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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경》해독-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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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3-04-22 08:15| 조회 :2,42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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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자경》해독-18


                                                 복단대학 전문충교수



삼자경의 력사는 삼황의 복희, 신농과 황제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세사람은 무엇때문에 삼황이라고 불리우겠습니까? 민간전통에서는 복희와 녀와의 교미도에 어떤 이야기를 기재했겠습니까? 복희는 왜서 중화민족의 인문시조로 떠받들리겠습니까? 신농은 중화민족의 발전에 어떤 거대한 기여를 했겠습니까? 삼황중의 첫째이고 오제중의 첫째인 황제에게는 어떤 신기한 이야기가 있겠습니까?

삼자경의 작자는 력사를 읽으려면 반드시 전제와 요구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요구겠습니까? 반드시 유가학설을 정통하고 유가학설 외의 다른 중요한 학설을 장악하여 그것을 기초로 력사를 읽기 전과 읽는 중에 비교적 믿음직한 표준을 형성하여 력사사건과 력사인물의 선, 악, 공, 과를 분별하고 어떤것은 흡취해야 할 경험이고 어떤것은 경각성을 일으켜야 할 교훈인가를 판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력사를 읽는것이 유익한 활동으로 될수 있고 근근히 이야기를 보거나 재미에 그치지 않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자경에서는 중국의 력사를 어떻게 말했는가를 보기로 합시다.【자희농 지황제 호삼황 거상세】 여기에서 말하는 “황”을 황제와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완전히 다른 뜻입니다. 삼황이라는 말은 전국후기에야 비로소 생겨났습니다. 삼황에 대해서도 중국전통에서는 여러가지로 말하고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녀와, 복희, 신농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수인, 복희, 신농이라고 합니다.

삼자경의 설법에 의하면 복희, 신농, 황제입니다 때문에 삼자경의 설법도 여러 전설속의 설법들중의 하나라고밖에 볼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사람은 어떻게 삼황으로 불리우게 되였겠습니까? 그들에게는 또 어떤 신기한 전설들이 있겠습니까?

먼저 복희부터 봅시다. 그는 중화민족 중국사람의 인문시조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시비가 없습니다.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당연히 신화적인 이야기밖에 없습니다.그런데 그 신화이야기 뒤에 력사적 사실의 그림자가 비껴있다는것입니다. 우리는 상고의 신화이야기를 일률로 선인들이 만들어낸  허구라고만 볼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표현방식이였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것처럼 장자가 우화를 좋아한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선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력사를 이야기하기 좋아했던 것입니다.

전하는데 의하면 화서씨의 나라에서 생활하던 한 처녀가 있었는데 옛날 녀성들은 성만 있고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 처녀는 성이 서씨였습니다. 그는 뢰택이라는 곳으로 놀러갔습니다. 그 고장은 풍경이 아주 수려했는데 놀다놀다 커다란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누구의 발자국인지는 몰랐으나 그 발자국을 밟았는데 인차 임신이 되였습니다. 서씨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복희라는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신화같습니까? 지금 같으면 누가 길을 가다가 감히 남의 발자국을 밟겠습니까? 밟으면 임신을 하겠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모계씨족사회의 한가지 특점을 말해줍니다. 오직 어머니만 알고 아버지는 몰랐습니다. 그때에는 부처제도가 제대로 건립되지 않았습니다.모계씨족사회에서는 어머니만 알고 아버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신화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큰 발자국이 아버지라고 한것입니다. 이것은 력사적인 사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 발자국의 임자는 뢰신이였습니다. 번개를 내리치는 하늘의 신이 남긴 발자국이였습니다. 그 뢰신은 사람의 머리에 룡의 몸둥이였습니다. 룡은 또 무엇입니까? 룡은 자꾸 변했습니다. 그때의 룡은 우리가 후에 청명고궁에서 본 그처럼 휘황한 룡이 아니였습니다. 최초의 룡은 그저 뱀과 비슷했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반고나 녀와도 모두 사람 머리에 뱀의 몸둥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런 뱀은 뱀이라 하지 않고 룡이라고 했습니다. 

룡신은 배가 크고 몸집이 컸습니다. 중국전통에서 복희는 원래 룡신인두의 룡이였는데 우리 중국사람들이 인정하는 선조였고 녀와의 오빠였습니다. 그들은 오랍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오랍누이가 결혼은 하고 자식들을 낳고 그래서 인류의 시조로 되였답니다.
오랍누이끼리 결혼하는것을 지금의 안목으로 보면 불가사의한것이지만 세계적으로 고대 민족중에서 많은 민족들에게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어느 민족에게나 다 있습니다. 때문에 그 후의 인류는 모두 오랍누이의 자손들인것입니다.그들 오누이는 당연히 인류의 시조이고 우리 화하자손의 시조입니다.

전하는데 의하면 복희는 고대 화하부락의 걸출한 수령이였다고 합니다. 복희는 천지간 음양지간의 변화에 근거하여 팔괘를 만들었는데 간단하면서도 우의가 심각한 여덟가지 부호로 천지간의 만물만사를 개괄하고 그들 사이의 변화도리를 개괄하였습니다.  복희는 지방과의 관계가 제일 컸습니다. 오늘의 감숙 천수를 그때에는 고성기라고 불렀습니다.그곳에는 아직도 대규모의 복희묘가 있습니다.

정월열엿새를 복희의 생일이라고 합니다그리고 5월13일을 복희가 신선이 된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때문에 정월열엿새와 5월13일이면 감숙 천수에서는 인문시조 복희에게 제사를 지내는 활동이 아주 성세호대하게 진행되는데 이미 상당히 오래되였다고 합니다.

복희가 만들어낸 팔괘는 후에 “역경”의 기초로 되였으며 중화민족의 문명사도 복희로부터 시작되였습니다. 류전되여온 복희도를 보면 복희가 생활한 년대는 원시사회 시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중화민족인문시조로 불리우는 복희는 인류의 문명과 발전을 위하여 또 어떤 기여를 했겠습니까?

전설과 사책의 기재에 의하면 복희는 인류문명의 시조 혹은 화하자손의 시조로서 그의 공적은 인민들에게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게 배워준것입니다.고대에는 자연환경이 좋았기 때문에 물고기가 많고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먹는 문제를 얼마간 해결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인류의 생산능력을 제고한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방법을 가르쳐주어 그때로부터 가축이 있게 되였고 많은 짐승들을 길들이게 되였습니다.

두번째가 아주 중요한 것인데 혼인습속을 변혁했습니다.남빙녀가를 창도한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래력은 똑똑하지 않았으나 빙녀가의 새로운 혼인제도를 건립하고 혈연혼을 족외혼으로 고쳐놓았습니다.같은 씨족간의 남녀는 결혼할수 없고 반드시 부동한 씨족간에만 결혼할수 있다는것입니다. 이 풍속은 줄곧 오늘에까지 연속돼왔습니다. 당연히 오늘은 방법이 없습니다. 도리대로 말하면 동성끼리 결혼을 못하게 되여있지않습니까? 저의 성이 전씨이니깐 전씨인 녀자와 결혼할수 없지않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대로 할수가 없습니다. 어떤 성씨는 일억이 넘습니다. 왕씨끼리 서로 결혼하지 못한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생겨나겠습니까?리씨가 리씨와 결혼하지 못하고 류씨가 류씨와 결혼하지 못하고 우리 전씨도 전씨와 결혼하지 못하게 하는것쯤은 그리 바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두다 희성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백가지 성에서 두번째로 많은 성에 속하지만 어쨋던 희성인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족외혼은 도리가 있다는것입니다.

지금 국가혼인법에도 어떤 부류의 친척간에는 결혼을 못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도리가 있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의학적인 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복희는 자식들이 어머니만 알고 아버지를 모르던 상태를 결속지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희는 모계씨족사회를 부계씨족사회로 전변시킨 그런 인물이라는것입니다.

세번째도 역시 중요합니다. [계약서를 창조]  기사에 쓰다 새끼에 매듭을 지어 일을 기록하던 풍속을 결속지었습니다. 그리고 글자거나 부호로 기록하는 습관을 창조했습니다.그전에는 모두 새끼에 매듭을 짓는 방식으로 일을 기록했습니다. 지금도 적지않은 소수민족들은 아직까지 이런 습관이 있습니다. 집집마다 긴 새끼를 준비해두고 새끼에 숫한 매듭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 새끼매듭은 사실상 한권의 책과 같은것입니다. 그 매듭 매듭마다에 모두 다른 이야기가 담겨져있는것입니다. 이 매듭은 어느날 어느때 누구와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고 이 매듭은 또 어느날 어느때 누가 내 돈 5원을 꿔갔다는 이야기를 기록한것입니다. 그들은 매듭을 보면 다 안다는것입니다. 그러나 복희는 그런 방식을 고쳐버렸습니다.

네번째. 도훈, 거문고, 비파와 같은 악기를 발명했습니다 그리고 가요를 창작하여 음악이 사람들의 생활속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여 사람들은 현실생활을 초월한 일종 예술적인 추구를 하게 되였습니다.

다섯번째, 통치구역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습니다.아울러 관원을 임명하여 사회관리를 하게 했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원래는 한무지였던것을 이제부터는 나누어 관리하게 한것입니다.

여섯번째: 원래는 력법이 없어서 날자도 모르고 살았는데 그가 력법을 만든것입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팔괘를 만들어낸것입니다. 이는 모두 다 믿고있는것이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년대가 너무나 오라고 멀기 때문입니다.

방금 제가 말한것은 이미 우리 민족의 공동한 기억으로 되였습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모두가 다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민족으로 되는것입니다.그렇다면 신농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는 중화민족의 발전에 어떤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어떻게 삼황중의 한사람으로 떠받들리게 되였겠습니까?

그의 이름에서 알수있는바와 같이 신농은 농업, 의약, 중의의 발명자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아주 원시적인 생활을 해왔습니다.신농은 쟁기와 농구를 발명했습니다. 나무로 만든 농구를 만들어 농업생산을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복희가 모계사회로부터 부계사회로의 전변을 대표했다면 신농은 수렵, 채집사회로부터 농업사회로의 전변을 대표했다는것입니다. 그전의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을 하거나 식물이나 산과일을 채집하며 살아왔기에 한끼를 먹으면 다음 끼가 걱정이 되군 했습니다.

그러나 농업을 하면서부터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파종으로부터 수확까지 생산량의 여하를 불문하고 어쨌든 예산이 있게 된것입니다. 땅을 부치면 먹을것이 생기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이 안정된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농의 공적입니다.신농은 무엇때문에 농업을 발명하고 무엇때문에 오곡을 심었겠습니까? 일부 고서에 기록이 있는데 이를테면 “백호통의”입니다.

한나라의 한 고서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모두 짐승의 고기를 먹었다. 신농에 이르러 사람들은 짐승의 고기만 먹는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신농은 인천지시 분지지리하여 쟁기를 만들고 농사를 배워주어 신이화지  사민역지하였는데 고위 신농이라 하였다

옛날에는 집승의 고기를 먹었는데 사람이 많다보니 짐승도 거의 멸종이 됐습니다. 그러다보니 먹을것이 당장 문제로 나섰습니다. 이런 때에 신농이 나서서 농기구를 만들어주고 날씨와 토지정황에 근거하여 경작을 하도록 배워주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정규적인 서적에 기록되여 있습니다.대단히 오래된 “습유기”라는 책이 있는데 아주 신시한 신화적인 색채를 띠고있는 책입니다.

그 책의 기재에 의하면 어느날 온몸이 새빨간 새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는것입니다. 중국고대의 신화에는 새가 특별히 많습니다. 초기신화에는 새가 많았고 중기신화에는 야수가 많았습니다.그 새빨간 새는 입에 오색빛갈이 나는 구수곡을 물었는데 그것은 벼에 오색빛갈이 나는 아홉개의 이삭이 달린것이였습니다. 그 새는 신농의 머리우를 날아지나갈 때 그 벼이삭을 떨어뜨렸습니다. 벼이삭은 신농의 앞에 떨어졌습니다. 신농은 그 벼이삭을 보고 하늘이 하사한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새를 하늘의 사자라고 여겼던것입니다. 비행기를 보지 못했던 옛날 사람들은 새가 날아가는것을 아주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벼이삭을 땅에 묻고 잘 보관해두었습니다.그런데 이듬해에 그곳에서 벼가 자라났습니다. 당시엔 정미기가 없었기에 신농은 손으로 벼를 부벼서 맛을 보았는데 그 맛이 대단히 좋았습니다. 거기에서 계발을 받은 신농은 황무지를 일구고 농업을 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농은 그래서 “오곡할아버지”라고 불리우게 되였습니다.신농을 농황할아버지라고도 불렀습니다.

신농은 또 우물의 발명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물을 발명한 공적을 신농씨에게 돌려야 합니다. 우물이 없으면  계획적인 관개를 할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신농우물 하나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신농의 옛집에 한 전설이 있습니다. 경상적으로 사람들은 백리를 걸어와서 물을 길어가곤 했습니다. 당지 사람들은 이 우물의 물이 영양액보다 더 좋아서 병을 치료할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우물이 바로 신농정입니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고고상에 증거가 없습니다. 후세사람들은 신농씨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숫한 묘를 지어 신농씨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원래는 누구도 그의 생일을 몰랐는데 누군가가 그의 생일을 결정해놓았습니다.  정월 초닷새로 결정한것입니다그래서 매년 정월초닷새부터 정월스무날까지는 신농씨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로 정해진것입니다. 지금은 그닥 중시하지 않지만 그때에는 무조건 이날에 제사를 지내야 풍년이 든다고 했습니다.

우리 민간으로 말할때 신농씨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신농본초입니다. 우리는 중의약의 발명권도 신농에게 주어야 합니다.신농이 백초를 맛본 이야기는 고서에도 기재되여있고 민간전설에도 있습니다. 먼저 두가지 전설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는 “머리에 구슬을 이다” 라는 이야기인데 제목이 아주 괴상합니다.

어느 한번 신농이 심산속에 들어가서 약초를 채집하게 되였는데 갑자기 한무리의 독사를 만나게 되였습니다. 독사들은 달려들어 신농씨를 감고 죽이려 들었습니다. 신농씨는 독사에게 물려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온몸이 마구 부어올랐습니다. 그래서 신농은 서왕모, 서왕모, 날 살려주시우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이 전설에서 보면 신농은 그때 이미 서왕모라는 신선이 있다는것을 알고있은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전설입니다.서왕모란 삼신할머니를 말합니다.

서왕모는 신농의 부름소리를 듣고 청조라고 하는 자기의 사자를 내려보냈습니다. 청조는 입에 구명선단을 물고  신농을 구하러갔습니다. 청조는 삼림속에 피투성이가 되여 누워있는 신농을 보자 물고 온 선단을 신농의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신농은 구원되였습니다. 청조는 자기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청조는 신농이 그 선단을 먹었는지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서왕모는 그저 약을 가져다 주라고 했을뿐인데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입에까지 넣어 주었으니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로 하늘로 날아갔습니다.

신농은 례절이 너무나도 밝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뱀에게 물린것을 알고 서왕모가 사자를 보내 약을 가져다 준것을 알자 급히 일어나서 청조야 감사하다 하고 크게 웨쳤습니다. 그 바람에 입에 물었던 선단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선단이 떨어진 자리에서 풀 한대가 자라올라왔는데  풀끝에 빨간 구슬이 달려있는게 아니겠습니까?.신농이 자세히 보니 방금 떨군 선단과 꼭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구슬을 따서 먹었더니 독사에게 물렸던 독이 말끔히 다 빠졌습니다. 신농은 그 구슬을 머리우의 구슬이라고 불렀습니다. 기실은 지금의 연령초였습니다. 연령초는 전문 뱀독을 치료하는 약재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전설입니다.

두번째 전설은 신농이 백초를 맛보았다는 전설입니다. 상고시대에는 식물들이 마구 섞이여 자랐습니다. 지금처럼 논밭이 따로 있고 밀밭이 따로 있는것처럼 갈라져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풀은 먹을수 있고 어떤 풀은 독이 있으며 어떤 풀은 약재로 쓸수 있다는것을 몰랐습니다. 신농은 백성들의 이런 질고를 알고 그들을 이끌고 약초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는 자기 고향집인 수주의 력산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가고 또 갔습니다. 전설에서는 몇년, 몇년, 며칠, 며칠를 걸었다고 했습니다. 길에서 많은 기이화초들도 보았지만 또 적지않게 범이며 승냥이와 같은 야수들도 만났습니다. 흉맹한 야수들은 신농일행을 둘러싸고 포위했습니다.신농은 수행인원들에게 채찍으로 야수들을 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수들은 금방 밀려갔다가는 또다시 인차 달려들었습니다.밀려갔다가는 또다시 밀려드는데 전설에서는 이렇게 꼬박 일주야를 반복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야수들은 아마 어느 놈이나 다 채찍에 둬서너매씩 얻어맞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금 야수들의 몸에는 대부분 줄이 나있지않습니까? 전설중에 야수들의 몸에 새겨진 줄이나 반점은 모두 그때 신농씨에게 얻어맞은 자리라고 합니다. 원래 상고시대의 야수들 몸에는 그런 줄이나 반점이 없었는데 신농씨에게 얻어맞은 후에 그런 종신유감을 남기게 되였다는 이야깁니다. 이것도 신농씨가 백초를 맛보는 사이에 있은 이야기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신농을 권고했습니다. 야수도 많고 산도 높은데 더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농씨는 사람들에게 벌목하는것을 배워주었습니다. 고대의 나무는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덕대를 매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덕대가 바로 오늘날  비계의 래원입니다. 때문에 지금 건축로동자들이 쓰고있는 비계의 발명권도 응당 신농에게 돌려야 할것입니다.

물론 신농은 약초를 얻기 위해 덕대를 만든것이지 집을 짓기 위해서 만든건 아니였습니다. 신농은 바로 그 덕대를 리용하여 높은 산에 올라갔고 또 그랬기 때문에 많은 약초를 얻을수 있었습니다. 얻어온 약초는 그가 먼저먹어보곤 했습니다. 게를 처음 먹은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몇번이나 중독되여 죽다가 살아났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병에 걸리게 한 풀은 독초고 그를 살려낸 풀은 약초인것입니다. 신농은 그렇게 364가지 약초를 골라냈습니다. 후세사람들은 이런 약초를 총결하여 신농본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고 보면 중의의 발명권도 신농에게 돌려야 할것 같습니다. 아직 비계를 잊지않았겠지요? 신농씨는 산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나무를 꺾어서 덕대를 만든것입니다. 신농은 그처럼 많은 약초를 맛보기 위해서 산에 오래동안 있었습니다. 얼마나 산에 오래 있었는지 그가 산에서 내려올때는 덕대를 매느라고 베낸 나무토막이 다시 자라서 제대로 나무가 되였더랍니다. 그것이 오늘의 신농덕대입니다.  신농덕대란 여기에서 온 말입니다. 이것이 신농이 백초를 맛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자희농  지황제  호삼황  거상세
自羲农  至黄帝  号三皇  居上世

황제는 삼황중에서 중화민족에  영향력이 제일 큰 사람이며 삼황의 제일일 뿐만아니라 오황에서도 제일입니다. 그렇다면 황제에 대한 어떤 전설이 있으며 황제는 중화민족의 발전에 어떤 거대한 기여를 했겠습니까?그렇다면 삼황중에서 세번째는 오늘까지 영향력이 가장 크고 우리 기억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있는 황제일것입니다.

황제는 성이 공손이고 헌원지구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래서 헌원씨라고 부릅니다.황제 성 공손 헌원씨 황제는 오늘의 하남성 신정일대에서 태여나서 섬서성 교산 오늘의 황제릉에 묻혔습니다.중국의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여러차례 황제릉을 찾았습니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이런 민요가 있습니다. [선조를 모시려면 신정에 가고 선조에 제사를 올리려면 황릉으로 가라]

황제는 고대전설속의 인물인데 그런 전설가운데서 가장 유명한것은 바로 전쟁입니다. 황제와 염제의 전쟁, 황제와 치우의 전쟁인데 나중엔 모두 황제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여러 부락의 추천에 의해 화하민족의 공동의 군주로 되여 중국 여러 부락을 통일했습니다.

황제의 주요한 공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력법, 수학, 군대, 음악, 의약, 황제내경, 문자, 주조, 배와 차, 활, 가옥을 추산한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배나 차가 없었고 활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또 집도 없어서 나무우에서도 살고 나무밑에서도 살았습니다. 황제때로부터 사람들은 천을 짜서 의복을 지어입었습니다. 그전에는 짐승가죽으로 대충 가리우고 살았습니다. 황제와 방직과의 관계는 사실상 가장 큰 문제입니다. 민간에서의 전설은 상당히 일치합니다. 물론 전부는 아닙니다. 모두 황제와 황제의 두 부인을 련계시키고 있습니다.

어느 봄날에 한 소녀가 누에를 치다가 황제를 만났습니다. 황제는 그 소녀가 몸에 노란색과 금빛색이 어울린 물건을 걸치고있는것을 보았습니다. 황제는 그 물건이 무슨 물건인지 몰랐습니다. 그 물건은 부드러운 감을 주었는데 땅에는 또 누에가 기여다녔습니다. 그것도 황제는 본적이 없었습니다.황제는 땅에 널린것은 나무잎이고 소녀가 몸에 걸친것은 짐승가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황제는 그것이 무엇인가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뽕나무는 어떻게 심고 누에는 어떻게 치고 고치는 어떻게 뜯고 실은 어떻게 뽑는다고 상세히 알려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후 황제는 지금 사람들은 여름에는 나무잎으로 앞을 가리우고 겨울이면 짐승가죽으로 앞을 가리우다보니 보장이 없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짐승을 잡으면 가죽이라도 있지만 짐승을 잡지못하면 걸칠것마저 없어지는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하는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농업처럼 몸에 걸치는것도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그 소녀를 안해로 삼고 그더러 백관과 인민들에게 방직술을 가르쳐주라고 했습니다. 그 소녀가 바로 루조입니다.

루조가 방직술을 발명하였기 때문에 인류는 의복을 입게 된것입니다. 그래서 루조는 방직시조로 불리웠는데 지금까지 많은 곳들에서 아직도 루조의 묘당에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전설에서는 루조를 단지 작잠술의 시조로만 인정하지 방직술의 시조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방직술의 시조는 누구이며 황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작잠술의 시조는 루조라고 했습니다. 이 루조는 황제의 본처입니다. 그때 황제의 나이 서른살을 넘었는데 적은 나이가 아니였습니다. 황제가 루조를 안해로 삼은후 루조는 녀자들을 조직하여 산으로 가서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쳤는데 인차 문제에 부딪치게 되였습니다.무슨 문제겠습니까? 누에도 많이 기르고 고치도 많이 거두어들였는데 어떻게 천을 짜는지 루조도 몰랐습니다.이때 그가 데리고 온 녀자들 중에 키가 작고 피부가 검고 아주 밉게 생긴 처녀가 실을 뽑는 물레를 발명했습니다.그는 물레를 돌리면서 한오리 한오리씩 실을 뽑아냈습니다. 그후에 그는 또 방직기를 발명했습니다. 

 황제는 그 일을 알게되자 그 발명을 높이 칭찬했습니다.그래서 황제는 그 밉게 생긴 녀자에게 그 기술을 전수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제일 큰 표창은 그런 녀자를 안해로 삼는것이였습니다. 루조는 중매를 서서 그 미운 녀자를 황제의 두번째 안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 녀자가 바로 모모입니다. 루조와 모모는 중국 비단업의 시조입니다.

민간에서는 루조는 잘 알고있지만 모모는 잘 모르고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전설에는 아주 특별한 정황이 생겨났습니다.무슨 정황이겠습니까? 고대에서는 황제에게 본처가 있으면 두번째는 안해라고 하지않고 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설에서는 루조와 모모를 다 황제의 안해라고 한것입니다.총적으로 황제가 재위한 시간은 아주 깁니다. 요, 순, 우, 탕은 모두 황제의 후예들입니다. 때문에 황제는 중화민족의 공동의 시조라고 합니다. 황제와 염제는 나란히 함께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황의 자손이라고 합니다.황제의 중요성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겠습니다. 삼자경에서는 또 전설속의 혈통을 이야기하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