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문학으로부터 본 중국문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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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1-11-03 09:14| 조회 :4,493| 댓글 :0본문
외국문학으로부터 본 중국문화(4)
륙건덕
그리고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것은 이번에 올림픽을 치렀는데 우리 모두 개막식을 보았습니다. 개막식에 주요하게 표현한것은 중국문화성취입니다. 바로 4대발명이지요. 이 개막식은 물론 아주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그 특점은 바로 소리. 빛, 전기 그리고 웅장한 장면인데 이것으로 성공한것입니다. 장면이 아주 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계적인 동작을 했는데 그들은 아마 일년 아니면 더 많은 시간동안 련습했을것입니다. 그래서 세인들을 놀라게 했고 중국은 이렇게 위대하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중국은 위대합니다. 하지만 이후 30년, 50년이 지나면 진짜 힘센 사람이 희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꼭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힘이 약한 사람은 자기가 힘이 세다고 자랑하고 힘이 센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힘 센 사람은 큰 소리가 없지만 일단 한마디 하면 책임을 지며 아주 드셉니다. 저는 미국외교정책의 비평자인데 만약 미국정부가 말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며 아주 견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때 한 국가가 자기의 성과를 어떻게 보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외국문학을 보는 가운데서 한번은 2001년 노벨상을 받은 나이보얼의 저작을 본적 있습니다. 이 저작은 <<하만>>이라 하는데 저는 문득 어떤 촉동을 받았습니다. 어떤 촉동인가 하면 바로 한 문화가 어떻게 자기의 성과를 보아야 하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이 <<하만>>에서 무엇을 이야기했는가에 대하여 제가 여러분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한 아랍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장사를 하다가 그곳에 정착하여 이슬람교인이 되여가지고 세세대대로 살아갑니다. 그는 자기 집의 력사와 인도양의 력사는 모두 유럽사람들이 쓴 책에서 알게 되였다고 합니다. 그는 아랍사람은 당년에는 위대한 모험가이고 작가이며 수부는 지중해에서 삼각범선을 띄웠는데 이런 범선이 그후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는데 밑받힘이 되였다>>고 했습니다. 인도의 항해안내원은 다가마를 데리고 동아프리카에서 칼카타에 도착했습니다. 저 역시 행표라는 이 단어를 최초에 사용한 사람이 페르샤상인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렇게 말하는것은 모두 유럽사람이 쓴 책을 보았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만약 유럽사람이 없었다면 자기들의 과거는 없어졌을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모래톱에서 어민의 발자국이 사라지는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기네가 유구한 력사가 있지만 력사감각은 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는 만약 어느 누가 이런 력사를 써서 비교하지 않았다면 자기들의 력사는 없었을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책에서 말한것은 지중해의 삼각범선입니다.
이 아랍인은 계속하여 자기의 생활방식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련의 작은 일들에서 새로운 사유를 계발받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계발받은것은 그 지방의 우표라고 합니다. 그가 사는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영국집정당은 아름다운 우표를 많이 발행했습니다. 우표의 도안은 모두 본 지방의 풍토인정을 그린것이였고 그중 한장에는 아랍독노범선이라고 이름한 우표입니다. 이 범선을 노 하나뿐인 돛배인데 그것을 그린 우표속에 외국인의 모습이 있는것 같았는데 이것이 제일 눈길을 끌었습니다. 만약 이 독노범선을 보지 않았다면 범선에 대하여 별다른 생각이 없었을것입다. 그것은 날마다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다보니 자기의 문화를 모르고 세계문명에 대한 공헌도 모르기때문입니다. 범선을 보아도 늘 보아오던것이여서 례상사로 여깁니다. 그러나 영국인이 발해한 이 우표로 하여 이 범선에 주의를 돌렸습니다. 이 부분이 아주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왜서인가 하면 거기에서 국가라는것을 생각하게 하기때문입니다. <<하만>>은 아프리카 국가가 현대화진척 과정에서 직면한 각종 장애와 곤난을 썼습니다.
그 다음 한 지도자가 원견성있게 멀리 내다보고 2000전에 이 국가를 어떠어떠한 나라로 건설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나라의 사회는 아직도 매우 흐트러져 있습니다. 세계문명에 대한 발전행정에 명석한 파악이 결핍합니다. 때문에 그후 개혁에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아랍인이 세계문명에 대한 공헌을 쓰면서 한 두 단락의 이야기가 저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이런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는데 례를 들면 우리의 4대발명같은것은 중국의 자랑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과정에 무엇인가 모자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것이 모자랍니다. 바로 저절로 이것을 자랑하지 못한것입니다. 중국은 세계문명에 이 4대발명으로 공헌했습니다. 당시 중국책만 본 사람은 모릅니다. 영국의 학자인 리웨써가 중국의 4대발명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가 어느 때에 말했는가 하면 항일전쟁시기에 중국에 와서 말했습니다. 그는 중국인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말했습니다. 비교적 높은 위치에서 문제를 볼줄 아는 사람만이 여러 곳을 돌아보고 거기에 어떤 새로운것이 있는가, 그것이 세계문명발전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지적합니다. 이건 아주 어려운 일인데 이런 능력이 우리에게 모자랐고 이 점을 몰랐습니다.
어떤 일은 맹목적으로 나가는데 혹시 심괄이 쓴 <<몽계필담>>을 보면 거기에 나오는 발견은 많은것들이 우연하게 마주친것이지 목적의식적이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례를 들어 한 사람이 페니실린을 발명한것은 우리가 어떤 발효물질로 병을 치료한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때문에 발명에 대하여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저의 생각에는 외국문학을 읽어보는 과정에 보통 심사숙고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나라나 자기의 발명창조에 대하여서는 흥미진진해 합니다. 독일사람은 독일이 세계문명에 어떤 공헌을 했는가에 대해 말이 없고 불란서사람이나 영국사람 혹은 미국사람도 말이 없습니다. 그들은 종래로 이 분야의 통계를 하지 않았고 말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후에도 자기가 세계에 어떤 공헌을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어떤 공적에 대하여 반영해야 되지 않는가고 말합니다. 이 소설에서 말한것은 이 영국사람이 아랍의 노가 하나인 범선의 력사적의미를 보아냈다는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는 모르고있습니다. 그리고 나이보얼은 어떤 면을 비평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당지의 아프리카 사회가 틀린다고 했습니다. 그는 식민지당지의 백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어야 한다는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맥빠진 소리도 했지만 그가 말한것은 아주 의의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가 문명속에 있으면서 그 문명이 어떤 특색이 있는가를 본인은 모른다는 말입니다.
당시 30년대에는 중국의 어느 한 과학가도 세계에 발명을 발표한것이 없었습니다. 모두 리웨써같은 사람이 말해서야 중국에서 발명한것이 어떤것들이라는걸 알게 되였습니다. 물론 리웨써는 어떤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 혹시 우리도 이런 발명이 있다고 말할수 있으며 완전한 중국의 발명이 아닐수도 있다는데서였습니다. 무엇으로 그후에 고등보에서 인쇄한 글자가 기필코 중국 필승한테서 별려간거이라고 증명하겠습니까? 필승의 인쇄술은 중국에 진짜로 영향을 주었겠는가? 혹시 별로 큰 영향을 일으키지 않았을수도 있는데 역시 론쟁이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상 우리가 어떻게 한 민족의 자신감을 확립하는가 하는데 관계됩니다. 한 민족이 진짜로 강대하다면 반드시 각종 발전의 맥락을 투철하게 볼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발명에서는 이 나라가 우세고 저 발명에서는 저 나라가 우세라는것을 보아내야 합니다. 이렇게 아주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누구를 보면 자기의 제일 중요한것을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마치 어릴때 우표수집하면서 서로 바꾸기도 하고 누가 자기에게 없는 우표를 보여주면 자기는 제일 좋은 우표를 다 보여주는것처럼 말입니다. 다 내놓은 다음에야 대방의 우표가 대단히 많은데 자기에게 보여준것은 다만 백분의 일밖에 안된다는것을 알게 됩니다. 대방은 그렇게 많은 우표를 갖고있으면서 조금만 보여주고 자기는 밑천을 다 보여준것에 아주 맹랑해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이 나이보얼의 제3세계사회의 문화에 대한 견해를 사실상 많은 면에서 우리가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 하나의 작품을 썼는데 <<인도3부곡>>입니다. 그 작품에서 사람을 아주 가슴 아프게 하는 현상을 썼는데 중국사람이 볼때 그런 현상은 중국에도 일찍 있었기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허나 나이보얼이 말하려 한것은 이 사회에는 민족적 국가적응집력이 없다는 일종 자학의식입니다. 그가 말한 1857년부터 1858년까지 인도사회에서 그자신의 선조는 인도인이였기때문에 인도의 력사에 대해 특별히 주의를 돌렸습니다. 1857년에 인도의 어떤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인도는 영국동인도공사의 한 부분이였는데 반란을 일으킨 원인은 사소한 일때문이였습니다. 그것은 영국사람들이 그들에게 신식총을 사용하게 했는데 이런 총 탄알집에 있는 곽을 입으로 물어열었습니다. 그 곽에 윤할유를 바르는데 돼지기름이나 소기름입니다. 인도교인이나 이슬람교도들은 이발로 그 곽을 물어여는것을 견결히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영국군관을 쏴죽여서 이 반란의 불길은 만연되였습니다. 영국사람들은 진압하기 시작해했습니다.
영국의 <<태오시보>>라는 신문에서 기자를 파견하였습니다. 이 기자는 인도에 온뒤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기자가 영국에서 파견되면 일기를 적어야 합니다. 나이보얼은 영국의 낡은 서점에서 그가 쓴 일기를 샀는데 아주 정교하게 인쇄제작된것이였습니다. 나이보얼은 이 기자가 19세기 중기에 어느 한 곳에 가서 그곳 의 풍물을 묘사하는 능력이 아주 좋다고 느꼈습니다. 마치 자기 집에서 쓴것 같았답니다. 나이보얼은 인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외로 나갔지만 바로 간디같은 사람도 자기가 생활했던 사회를 잘 묘사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문학연구에서 습작은 일종 권력이고 힘입니다. 하나의 과제를 관찰하여 그것을 써낼때는 권리를 행사하는 시기입니다. 이를테면 작은 곳에서 살던 사람이 큰 곳에 가면 눈이 부셔서 이 큰 곳을 형용할수가 없는것과 같습니다. 나이보얼은 이 워랜라쌀이라는 기자가 인도와 와서 제집에 온것처럼 능란하게 글을 썼다는것입니다. 이 기자가 처음 인도에 왔을때 수웨즈운하가 아직 개통되지 않았는데 그가 인도에 와서 어떻게 영국의 부대를 따라서 인도의 반역부대를 진압하였다는것을 썼습니다.
이 기자는 이곳에서 이상한 일들을 발견했는데 반역부대를 진압하러 라크노라는 도시에 갔는데 길에서 영국군관에게 많은 인도하인들이 저녁이 되면 정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천막을 치고 먹는 정식에는 료리 한가지라도 모자라면 안되고 술은 꼭 잘 갖추져야 하는데 흰술이나 포도주나 혹은 다른 술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형식은 그대로 진행됩니다. 더 이상한것은 길에서 인도사람들이 끊임없이 불어나는것인데 담가를 들거나 짐을 메는 하인부대들이 영국부대를 따라 함께 인도인을 진압하러 가는것이였습니다. 그리고 이 부대에는 많은 시커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인도의 시커편 저부성 북쪽에서 살았는데 거쿨지게 생겼습니다. 그들은 머리에 천을 감고 다니는데 크로즈까지 온다음 영국군은 그들이 싸움을 잘한다는걸 알고 은근히 근심했습니다. 그들이 싸우기 시작하면 리규처럼 칼을 무섭게 휘두릅니다. 기자는 결국 이 민족은 자각의식이 없고 그 어떤 응집력도 없다는것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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