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문학으로부터 본 중국문화(5)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1-11-03 09:16| 조회 :4,946| 댓글 :0본문
외국문학으로부터 본 중국문화(5)
륙건덕
이 기자는 두가지 사회를 보았는데 나이보얼에게 이 두가지 사회에 대한 감촉이 아주 깊었습니다. 하나는 해외에서 소수의 영국인이 부대를 조직하는데 그렇게 적은 영국인에 의거하여 방대한 인도의 인력자원을 움직이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아주 거대하고 산만한 인도사회였습니다. 이 인도사회는 중심이 없고 민족과 나라라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후에 이런 일은 끝났습니다. 1858년에 이르러 진압되였습니다. 그럼 이러한 일은 실제로 19세기 중국에서도 있었습니다. 많은 회억록에서 발견할수 있는데 제2차아편전쟁때나 8국련합군이 침략했을때 바로 이런 외국부대가 중국연해지구에 와서 중국민공을 아주 쉽게 모집했습니다. 급급히 그들은 많은것을 얻어가고 운반해가려고 그랬는데 이런 일은 외국사람 저절로 한것이 아니고 우리 중국사람이 했습니다. 8국련합군이 쳐들어왔을때 중국인들로 결성된 <<화용단>>이라는 부대가 있었는데 이 부대가 전투에서 아주 용맹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들의 사진을 보면 입은 옷이 영국인이 내준것이였습니다. 영국인은 그들에게 전투는 어떻게 해야 하며 묘준은 어떻게 하고 기관총은 세사람이 어떻게 조종해야 한다는 등을 가르쳤습니다. 이런것들은 당시 인도사회와 아주 흡사한데 바로 민족의 응집력이 없는 나라라는것을 말해줍니다.
때문에 이런 상황이 로신선생으로 하여금 1914년 결연히 의학을 포기하고 문학에로 전향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문장으로 중국사람의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려 했습니다. 림금남선생은 <<흑노우천록>>같은 작품을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걸 알려주려 하였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외국작품을 읽을때 좀 더 신경을 쓴다면 많은것을 발견할수 있으며 자질구레한 사건일지라도 감수가 다를것입니다. 물론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사건을 간단하게 좋거나 나쁘다고 론할것이 아니라 좋고 나쁜것이 한데 엉켜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중국이 이렇게 모래알같이 흩어졌기때문에 남을 침략하려 하지 않는것을 좋은것이라 한다면 그들에게는 강력한 자각의식이 없는것이며 세계사람들을 교육하려 한다거나 하는 충동이 있을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문화에는 침략본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남을 개조하려 하는데 이런 념원이 있으면 좋은 점이 바로 강력한 향심력이 생기는것입니다. 이런 향심력이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이것이 어떤 때에는 아주 소심하게도 느껴집니다.
중국문화에는 지금에 와서 반드시 다른 문화와 비교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말을 하거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진정한 대국에 어울리기에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태연자약하지 못한데 마치 제가 어렸을때 우표바꾸기를 할 때처럼 단번에 제일 좋은 우표를 내보이고 대방의 우표대가는 조금만 꺼내놓은데 대하여 아주 놀라워한것과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듬직해야 합니다. 그런다면 사람이나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 더 잘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의 생활에서 체현되였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변화되고 있고 대화하는 방식도 변화되고 있습니다. 례를 들면 우리가 원래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금지해야 하는가를 지금은 아주 완곡하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어째서 완곡하게 말하게 되는가 이 완곡한 과정이 사실 우리가 대외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천천히 배워온것입니다. 내가 원래 할 말은 이런데 그것을 완곡하게 말하니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기분이 좋습니다. 만약 우리가 줄곧 중국의 문화권안에만 있으면 습관되여 완곡해질수 없습니다. 례를 들어 한 아이가 무대에서 노래 한곡 부르고 한곡 더 부르고싶어 합니다. 이때 어서 내려오라고 하고 잘난척 하지 말라고 한다면 곁에서 듣는 사람도 아주 난처하고 불편합니다. 그 자리에서 아이를 훈계하면 다른 사람도 거북합니다. 하지만 잰. 오수딩소설 <<오만과 편견>>에서의 주인공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는 <<노래를 잘 불렀어요. 더 부르고 싶지요? 그런데 다른 녀사들에게도 노래 부를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가요 자, 박수! 다음분 나오세요.>> 이런 일이 아주 많지요.
우리의 중국문화가 원래는 이러한 점에 확실히 많은 중시를 돌렸습니다. 하지만 근 백년래 백화운동이 활발하게 발전됨에 따라 무감각하게 변화했습니다. 점점 되는대로이고 언어도 거칠게 변했는데 이 사회가 마치 베아링에 윤활유가 없는것처럼 운행하면 삐걱삐걱 소리가 나고 부속품이 인차 마사지고 다음에는 이 기계가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언어를 좀 개진한다면 이 사회에 많은 윤활유가 있는것처럼 그전과는 달라질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외국문학의 애독자이고 역시 중국문학의 나팔수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외국문학을 많이 볼것을 아주 제창하며 외국문학을 볼때 많이 비교하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비교할것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임의로 례를 들면 중국의 문화에는 원래 애정이야기의 주인공이 다 장원이나 글을 읽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제가 방금 말한것과 같이 우리 민족이 비교적 연약한것과 관계있습니다. 그러나 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안나 카레니나를 보면 그는 우룬스끼라는 군인을 좋아합니다. 그럼 19세기 독일의 소설가 팡다너가 쓴 유명한 소설 <<아페 부리스터>>에서 여주인공 역시 소위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중국문화에서 군관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원래 훌륭한 남자는 군대에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관공이나 장비같은 영웅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모두 가정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영예는 장원에게 주는데 이 장원은 시험을 쳐서 합격되면 사회의 인물로 생할의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작품은 바로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 장원이 성공했고 큰 출세를 했다는데 그칩니다. 그가 사회를 위해 어떻게 복무하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이야기가 끝납니다. 이것이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여 출세하는것과 같지 않습니까 어쨋든 출세하여 목적을 이루었으니 금의환향하면 그만이라는 식입니다. 이런한 관습이 외국문학과는 감각이 다릅니다.
우리는 늘 정치적제재를 보는데 인물형상이 어떠합니까 그 인물이 역할은 하면서 물론 개인의 포부를 갖고 사회를 위해 어떻게 봉사하는가, 이러한 봉사의식이 어떠한가를 보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중국의 문화에는 이러한 봉사의식이 약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출세한 사람이라면 혹은 지식인이라면 얼마든지 공중봉사를 할수 있고 이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하여 그들은 관원을 공무원이라 부릅니다. 공무원이란 이름은 영어로 하인이라는 뜻입니다. 일종 봉사의 관념이 들어있습니다. 때문에 큰 일이 있으면 지식인이 여러가지 일들을 합니다. 제1차세계대전 제2차세계대전때 영국의 아주 훌륭한 지식인들이 정보기구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지식인이 너무 적어 실력을 보존해야 했기에 대학을 전이시켰습니다. 대학생을 전쟁에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는 이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외국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너무 큽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이 외국에 가볼 기회가 있다면 아주 놀라워할것입니다.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때 대학에서 아주 많은 우수한 학생들이 죽었다는데 대해 말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질책합니다.하지만 그들이 그 사회에서 지위가 높았지만 전쟁터에 나간것을 감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제가 제일 강조하기싶은것은 지금 이 사회가 이미 아주 큰 변화를 일으켰고 아울러 새세대들이 아주 탄복할만 하다는것입니다. 지금 대학에는 많은 지원자들이 나왔고 그들은 일을 하는것이 사랑의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제가 공부할때는 사랑의 마음이란 단어를 말할줄 몰랐습니다. 날마다 투쟁을 강조하고 공부를 잘 한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앞날에 머리를 썼습니다.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들은 새기상이 있습니다. 자기의 민족적단결의식이 있습니다. 중국이 어떤 국제적사건에 직면하여 불공정한 대우를 받으면 함께 뭉쳐서 일어납니다. 이를테면 올림픽홰불이 국외에서 전달될때 어떤 곳에서는 중국사람들이 모여서 올림픽홰불행진활동을 방애하는것을 항의했는데 그들이 모일때 뻐스표나 기차표는 다 자기절로 샀습니다. 이런것들은 국가민족의 의식이 날로 강화되였고 사회도 더 자신감이 있고 너그러워졌다는걸 보여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발전과정에 아직도 커다란 장애가 있습니다. 그길목은 문학과 관계됩니다. 그것은 중국사회가 아주 오랜 시기동안 농경사회였는데 그 농경사회의 습성을 어떤 외국사람들은 깔보고있습니다. 그들은 중국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안락한 생활에만 만족하고 민족자강의 능력이 모자란다고 여겼습니다. 더 강한 민족이 이런 민족과 경쟁할때 이런 중국의 민족은 쉽게 무너진다는것이였습니다.
실제로 다행인것은 중화민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1949년이후 점차 나아지게 되였는데 바로 우리에게 강한 정부가 있었고 이 정부와 사회사이에 서로 호응이 이루어졌습니다. 더우기는 이 몇년래 이 방면의 진보가 더욱 큽니다. 하지만 우리게게 아직도 많은것이 수요되는데 바로 우리의 이 사회가 어째서 자발적인 흥취가 모자라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진정으로 모자라는것이 창신능력입니다. 우리의 사회가 총적으로 말해서 너무 실용적이고 너무 공리적입니다. 설사 올림픽에서 무언가 체현하기는 했다지만 우리들이 각자마다 과외애호를 가져야 하며 이런 애호를 여러 령역에 리용하면서 자기의 대가를 너무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꼭 금메달을 따서 장려로 집 한채 가져야 한다거나 코치도 집 한채 타야 하며 자기도 고향에 돌아가면 어떤 상금이 있을지 또 곽영동한테 가면 그가 금괴를 주지 않을가 하는 생각은 안 좋습니다. 이러면 풍기가 나빠집니다. 결과적으로는 원래 좋은 일을 시작했다가 그 성질을 점점 변화시키는데 이런 변화는 이 사회총체적경쟁력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또 수요되는것은 제가 외국문학을 읽었을때 감촉이 아주 깊었는데 제가 우에서 말한 캉라더의 많은 소설에 영국의 바다를 쓴것입니다. 캉라더는 해양소설을 쓰고 배우의 생활을 썼는데 배우의 생활은 아주 규률적이라고 했습니다 배는 하나의 작은 천지이고 배우의 사람들은 아주 큰 향심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달이나 두달이상 항해하면서 망태기가 될수 있고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문학에서 바다에 대한 장면을 보면 이런것이 거의 없습니다. 외국문학에는 바다가 비교적 많습니다. 하마로부터 시작하여 <<오디쎄이>>까지 다 바다로 나갔습니다. 또 아주 많은 전설에서 보면 그 례로 신마더의 전설에서 그느 줄곧 서쪽으로 항해했습니다. 어디든지 관계하지 않고 바다로 가기만 했습니다. 물론 중국의 정화도 바다로 나갔지만 정화는 그후 우리 문화의 유기적조성부분이 되지 못하고 이미 파뭍힌 과거로 되였습니다. 우리 문화본신이 이렇습니다. 영국문학을 보면 여러분의 감촉은 더 깊을것입니다. 영국문학 <<로빈손 크르소>>에서 로빈손의 세계는 바다입니다. 그는 바다의 외딴섬에 갔습니다.
또 디포를 봅시다. 그에게 바다에 관한 소설이 아주 많은데 바로 이런 해양문화입니다 우리의 혈맥속에 해양문화인소를 어떻게 많아지게 할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 중국현재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바다는 비유에 불과한데 우리가 <신주7호>>를 하늘에 올려보냈습니다. 이런 정신은 마찬가지입니다. 태공에로 발전하고 바다에로 발전하려는 꿈이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이 있어도 마다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바다로 나가 실험을 하며 혼자서 범선을 몰고 지구 한바퀴를 돌수는 있습니다. 신문을 보면 늘 이런 소식을 알게 되는데 어느 외국의 한 기인이 그랬습니다. 또 영국의 한 녀성이 혼자서 범선을 몰고 어쨌다는가 하는 것들을 말입니다. 중국사람은 이런 일을 한적이 없습니다. 만약 중국사람이 이런 일을 하기 시작했다거나 많은 것을 계획하고 어떤 모험을 한다면 우리에게는 아주 많은 활력과 무진장한 힘이 생기게 됩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13억인구가 합쳐서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가석하게도 우리는 지금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학생들이 어떤 모험적인 계획같은것이 아주 적습니다. 2년전에 북경의 몇몇 사무일군들이 신강에 갔는데 한 녀사가 불행하게 길에서 사망되였습니다. 후에 신문에서 사론을 발표하여 여러분에게 안전이 제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영국이나 미국, 불란서에서 해마다 대학생들이 이런 일에 죽는 일이 있는데 사론을 발표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런 민족의 힘을 우리는 따라배워야 합니다. 다만 나라에서 몇백만 혹은 몇천만을 투자하여 한 운동원을 3살때부터 훈련시켜 최후 금메달을 따게 하는것도 의의가 있지만 이 의의는 과감한 모험과는 차이가 아주 큽니다. 때문에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영국의 시 한수 읊어드리겠습니다. 제목은 <<해일>>입니다. 우리가 열이 날때가 있는데 그것을------리라리고 합니다. 지금 많은 열이 많은 친구가 있는데 음악을 좋아하고 작사악을 좋아한다든가 하는 친구들 말인데요. 영국의 30년대시인 쓴 시입니다. 이 발열친구가 사랑한 대상은 바다였습니다. 나는 꼭 바다로 나갈것이다. 더 나가서 외로운 바다로 외로운 하늘을 향하여 내가 요구하는것은 아주 높다란 배이고 계명성이 배길을 안내한다. 나의 키잡이는 빠작빠작 소리를 울리며 바람은 노래같은 소리를 내고 흰 돛은 펴서 펄펄 날린다. 해면에는 희읍스름한 안개가 덮히고 회색나는 아침은 서광을 맞는다. 이것이 제일절입니다. 그 다음은 이렇습니다. 또 어떠한가 줄달음치는 조수가 나를 부른다. 나는 바다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야성의 소리이고 역시 친절한 부름소리이다. 이 부름을 나는 듣지 않을수 없다. 내가 요구하는것은 바람 부는 날씨인데 바람이 있어야 돛을 올리고 전진할수 있으며 흰 그름도 날아옐수 있기때문이다. 배가 항행할때 파도가 이는데 물결이 운 날려가고 갈매기가 멀리서 울어댄다. 이런 시들은 영국에서 흔히 보게 되는것들입니다. 이 시는 아직도 긴데 다 읊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가 중국문학에는 없습니다. 저는 젊은 세대들이 외국문학을 읽을때 우리 중국문화에 이런 성분을 보태주어 그것이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크나큰 축복으로 될것을 희망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