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吉林

산과 물의 웨침-1 > 음악

본문 바로가기
전체인기글

산과 물의 웨침-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1-07-23 18:29| 조회 :5,536| 댓글 :0

본문

                   산과 물의 웨침-1


                         -항일전쟁시기 계림음악제작 론평

                          계림관광고등전문학교 교수 왕소곤



(가사) “고향”

장범 작사 륙화백 작곡
고향! 내가 자라난 고향
너는 천당이였네.
맑은 강물 흘러가고 버드나무 춤추고
낮다란 언덕엔 수림이 무성하고
봄빛 푸른 초원에선 소와 양떼 뛰놀고
가을엔 해빛이 찬란하였네.
월야엔 배타고 호심에서 노니는데
장엄한 절당엔 석양빛이 남아있네.
지금은 변했네 모두 변했네.
야수의 도살장 되여버렸네.
고향 고향 나의 어머니
아…나의 집 언제면 돌아가랴
나의 집으로 언제면 돌아오랴
그립던 고향 모습.


1931년 9월 18일,일본이 심양을 침점하면서 침화전쟁의 서막을 었습니다.그 때로부터 장장 14년이나 되는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이 폭발하였습니다.1937년 7월7일의 북경 로구교사건과 상해의 8.13 사건 후부터는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하였습니다.당시 국민당정부는 이미 정부의 중요한 기관을무한과 중경으로 옮겨갔습니다.1938년 10월에 무한이 함락되자 무한에 모였던 많은 문화인들이 연안이나 중경으로 흩어져 갔습니다.계림에도 오고 곤명에도 갔습니다.연안은 혁명이 성지로서 연안이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중에 일으킨 역할과문화건설에서 일으킨 공헌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중경은 국민당 정부의 소재지였습니다.그 때는 제 2 수도였습니다.본래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였는데장개석의 직접적인 공제하에언론, 정치 등 여러면에서 인민군중들에게진정한 민주를 주지 않았습니다.때문에 중경의 항전문화는 생기발랄하게진행되지 못했습니다.

곤명은 주요한 교육도시였습니다.당시 국내의 일부 저명한 대학은 모두 곤명으로 옮겨갔는데 이를테면북경대학, 청화대학, 남개대학 등입니다.곤명은 교육의 도시였습니다.그 때 계림에는 문화골간들이 왔습니다.유관통계에 따르면 천여명 전문가들이계림으로 왔다고 합니다.우리 음악계로 보면 이백여명 음악가들이계림에서 인민들과 운명을 함께 하면서민족의 존망을 위하여 싸웠다고 합니다.왜서 그처럼 많은 음악가 문화인들이계림으로 왔겠습니까.그 때 리종인을 위수로 하는 계림에서는비교적 개방적인 민주정치를 실시했습니다.그들은 장개석을 반대하려면 반드시공산당과 련합해야 한다고 인정하였습니다.다른 한 중요한 방면이라면 중국공산당의항일민족통일전선이 계림에서 아주 잘 관철 집행되였습니다.계림에서 그처럼 휘황한 성과을 올리게된것은개방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우리 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의 방침 정책이 계림에서잘 관철되였기 때문입니다.제가 주요하게 말하려는 것은 항일전쟁시기 계림의 음악창작입니다.

항일전쟁시기 계림의 음악창작

(1) 아동음악창작

먼저 아동음악과 아동가곡의 창작에 대하여말하겠는데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만겸자선생이신데 원명은 만복민이고계림시 려보현 만동촌 사람입니다.그는 우리 나라 유명한 음악교육가이고성악교수이며 광서예술교육사업의창시인이고 선행자입니다.그는 일생의 정력을 광서의 예술교육사업에바쳤는데 그 공훈은 천추에 길이 남을것입니다.만천자선생은 관리의 가정에서 태여났는데아버지 만문금은 상림현, 상사현 현장을 맡아 하였습니다.아버지는 아들이 학도를 닦는 길로 가기를바랬지만 만겸자는 고향의 민족민간음악에도취되여버렸습니다.그는 음악을 무척 사랑했고 어려서부터음악을 배울 포부를 품었습니다.그래서 부자간에는 늘 모순이 생겼는데 나중에는 저명한 교육가 마군무박사의 지지로아버지는 만겸자의 애호를 동의했습니다.그리하여 만겸자는 1929년에 상해에 가서당시 유일한 음악전문학교인 상해음악전문학교에 시험쳐 붙었습니다.

우리 광서에서 제일 처음으로 전문적인음악교육을 전수받은 사람입니다.1935년에 졸업한 후 저명한 교육가 뢰패홍선생이 국장으로 있은 광서교육청에 분배받아 일반 편심이 됐습니다.당시 광서의 음악교육이거나 미술교육은매우 차하고 매우 락후했습니다.많은 학교에 음악과나 미술과가 없었습니다.조건이 좋은 학교에서 음악과와 미술과를설치하기는 했으나 교원력량이 부족하고교과서가 제대로 없어서 보다말다 하다보니아주 규범화 되지 못했습니다.이런 정황하에서 만겸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교과서를 편찬하기 시작했습니다.교과서를 편찬하면서 그는 안해 종지휘와합작하여 수십수의 아동가곡을 창작했습니다.저급학년에서 부를수 있는 “수탉”, “나비” "꼬마제비” 를 창작하였고 고급학년에서 부를수 있는 “중화를 사랑해”, “ “사랑하는 새 광서”를 창작했습니다.조국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감정이만겸자의 창작에서 반영되였습니다.

만겸자선생이 심각한 사상교육함의를자그마한 아동가곡에 주입한것은 아주 감복할만한 일이였습니다.만겸자가 창작한 아동가곡은 형상이 생동하고 절주가 명랑하고 입에 잘 올랐습니다어떤 아동가곡은 력사의 고험을 겪고오늘까지 불리우고 있습니다.때문에 항일전쟁시기의 음악창작은만겸자로부터 시작되였다고 말해야 합니다.1936/ 1937년에 출판된 “음악”교과서에서만겸자는 중학교 음악교과서 두책과소학교 음악교과서 두책을 펴냈는데모두 광서교육청의 이름으로 냈습니다.그때는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하기전인데 광서와 계림의 음악창작은만겸자선생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그는 계림의 항일전쟁시기음악창작의선구자였습니다.

항일전쟁의 진전에 따라 많은 음악가들이계림으로 왔는데 이를테면 륙화백선생이라던가,중국 제1호 남고음가수 호연선생이라던가,저명한 교육가 오백초선생 등입니다.그들은 대량의 아동가곡을 창작했습니다1938년5월7일에 거행한 광서성회,다시 말하면 계림아동항일전쟁노래경연에서반드시 불러야 하는 지정가곡은 모두 계림의 음악가들이 창작한 가곡이였습니다.심지어 그때 아직 계림에 오지 못한려익선생 , 하록정선생, 강정선선생, 진전학선생이런 전국적으로 저명한 음악대가들이계림의 음악간물에 많은 아동가곡을 발표했습니다.이러한 것들을 일일이 렬거하지 않겠습니다.


(2) 군중가곡창작

군중가곡창작도 만겸자선생이 먼저시작하였는데 만겸자선생은 아동가곡창작의 선구자였을 뿐만아니라 계림 군중가곡창작의선구자이기도 하였습니다.1936년 6월 국민혁명군제4집단군간부정치훈련반에서 출판한 “군가’ 에는 모두 열수의 군가가 수록되였는데그중 여덟 수가 만겸자선생의 작품이였습니다.1936년 6월 항일전쟁이 아직 전면적으로폭발하기 전에 만견자선생은 이미 창작을 시작했는데그 중에서 “징병가”를 보기로 합시다.

징병가

만겸자 작사작곡

징병, 징병, 징병
징병은 옛날에도 있었으니
사나이 징병을 싫어한다 말아라.
병사가 되여야 좋은 국민 되노라.
나라가 위험하고 산하가 기우나니
백성 된 의무를 리행해가자.
동포야 집 근심 하지말아
나라가 없고야 집이 다 웬말이냐.
동포야 정신 바싹 차리고
어서 빨리 참군하자 참군하자
령수 따라 앞으로
우리의 앞길에 광명이 밝아온다.

징병가는 그중의 한수의 군가이고“징병가”를 이어서 “조련”과 “전진”이 있는데 이 노래는 아주 비장한 전가입니다.특히는 음악표현에서 당시의 국세가뒤흔들리고 산하가 기울어지는 형세를잘 표현했을 뿐만아니라 빨리 빨리 일떠나참군해야 한다는 박절한 희망을 잘 결합시켜 표현했습니다.“징병, 징병, 징병…” 은 아예 큰3화성으로형세, 급촉,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많은 음악가들이계림으로 와서 몇천수에 달하는 항일구국가곡을 창작해 냈습니다.그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가장 크고가장 오래 동안 불리여온 가곡이륙화백의 “대서남을 보위하자”입니다.

“대서남을 보위하자”의 창작배경을 보면1938년 11월 일본군대는 북해와 흠주로부터등륙하여 남녕을 정령하고 계남일대를향하여 전진하면서 광서와 서남 각 성과의련계를 끊어놓으려고 했습니다.이때 곤륜관대전은 온양 중에 있었습니다.성소재지인 계림에서는 대서남을 보위하자는선전주활동을 벌렸는데 형세가 위급했습니다.1931년 11월 25일에 륙화백이 이 노래를 창작하였습니다.서로소남각을 해방할 때 년세가 계시는 분들은다 알고 있지만 십자가에서 서로소남각에우전국이 있었는데 거기에 림시로 공연할수 있는 무대를 꾸몄습니다.륙화백은 광서예사반합창단을 데리고 무대우에 올라가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계림에서 꾸리던 “소탕보”에서는 전문란을 설치하고 이 노래를 발표했습니다.그리고 또 노래를 만여장이나 되게 찍어서군중들에게 나누어주어 그 영향이 커졌습니다.

이 노래는 또 곤륜관 전선에까지 퍼져가서전사들의 사기를 고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후에는 복건국립음악전문학교의 교장이고가사작가인 로전이 륙백화가 쓴 “대서남을보위하자”에 “대동남을 보위하자” 라고가사를 붙여서 복건, 광동, 강서일대에서부르게 하여 사람들의 투지를 고무했습니다.때문에 이 노래는 계림에서 창작한 가곡중에제일 광범위하게 류전된 노래입니다.위청려- 계림문화성 경력자 음악교수:계림뿐만아니라 광서 어디에나 다 펴졌습니다.노래는 후에 만부나 인쇄되였는데광서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대서남을보위하였습니다.

1944년 7월에 대후퇴를 할 때에도중학생들은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후퇴를 하면서도 이 노래를 부르면서꼭 대서남을 보위하겠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80년대에 광서영화촬영소에서 “대아장혈전”을 찍은 후 곤륜관대전을 반영하는 영화를 찍었는데 그 영화의주제가가 바로 륙화백의 “대서남을 보위하자”였습니다.후에 여러가지 원인으로 그 영화를 상영하지못하다가 작년 항일전쟁승리 60주년 때에야해볕을 보게 됐습니다.여러분들도 주의해서 듣게되면 이 노래를 들을수 있습니다.그때 광서영화촬영소에서는 륙화백선생을청해다가 음악고문으로 모셨습니다.

계림에서 항일전쟁시기의 군중가곡창작 중 제일 영향력이 큰 노래가 바로 “대서남을 보위하자”인데 바로 륙화백선생이 작곡한 노래입니다.다른 한 노래는 서모선생이 작사 작곡한“너 이 나쁜 놈아”라는 노래입니다.(배경사진자막: 서모 (원명 장수모)1912-1001이 노래는 풍자적인 군중가곡입니다전쟁은 인민들의 생활에 커다란 재난을가져다 주었습니다그러나 간상뱅이들은 인민들의 생활을 아예 아랑곳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서모선생의 “너 이 나쁜 놈아”는국민당통지구역에서 재빨리 전파되였습니다.

(가사): 너 이 나쁜 놈아

너 너 너 이 나쁜 놈아
시장에선 일용품도 살수 없는데
무더기 무더기로 집에다 무져두니
너만 잘 살면 다 되는 거냐
정부의 법령도 가짜란 말이냐
나쁜 놈 나쁜 놈 너 이 나쁜 놈아
남들은 항일 위해 돈과 힘을 바치는데
너는야 온종일 돈궁리만 하는구나
죽은 후에 돈을 해선 뭘 하느냐
관속에 넣고 가진 못하지 않느냐
나쁜 놈 나쁜 놈 총살을 맞을 놈나쁜 놈
나쁜 놈 총살을 맞을 놈

장서선생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을겁니다.1938년 12월 17일에 계림에 왔는데24일에 일제의 비행기 폭격에 사망했습니다.그의 큰 딸 달진이도 함께 죽었습니다.바로 지금의 문창교 인민병원 부근입니다.짧디 짧은 일주일 사이에 장서선생은두수의 노래를 지었는데 한수는 “원쑤를 갚자” 이고 한수는 중앙부상병병원의요청에 의해서 쓴 “부상병의 노래”입니다.두수의 노래에는 애국음악가가 민족존망의관건적인 시각에 인민들과 함께 호흡하고나라를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며일본의 침략에 분개하는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지금 장서렬사묘는 칠성공원 왼쪽의 벽림산기슭에 모셔져 있습니다.가히 기념할만한 곳이고 일본침략자들이우리 계림인민과 중국인민에게 지은 죄악이 남겨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대서남을 보위하자”와 장서선생의 곡은 모두 계림항일전쟁시기에 창착된 우수한 군중가곡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음악 목록

Total 3건 1 페이지
음악 목록
산과 물의 웨침-3 인기글 산과 물의 웨침-3 (5) 희곡가곡창작다섯번째로 희곡가곡창작을 말하겠습니다.가곡은 원래 음악의 범주에 속하고희곡은 희곡의 범주에 속합니다.희곡과 가곡을 합해놓은 것은 전한선생의 공헌이라고 생각합니다.항일전쟁 때에 매우 많은 희곡가들이 계림에 왔습니다. 이를 테면 구양서천, 전한 등입니다.전한선생은 모두 잘 알고있지만 문학가이고 시인이고 희곡가인 동시에 음악문학가입니다.중화인민공화국 국가를 바로 전한선생이작사하신겁니다.그는 여러 방면에서 커다란 공헌을 …(2011-07-23 18:37:05)
산과 물의 웨침-2 인기글 산과 물의 웨침-2 (3)예술가곡과 합창가곡의 습작제3부분에서는 예술가곡과 합창가곡의 습작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먼저 말한 아동가곡과 군중가곡에 대해서는비교적 리해하기가 쉽습니다.예술가곡은 그로서의 특정정인 함의가 있습니다예술가곡이란 무엇입니까예술가곡은 간단한 독창가곡이 아니라이름 그대로 작곡가가 연창선률을 쓸때함께 피아노반주도 써야하는 것입니다.독창배우가 남자거나 녀자거나 남자고음이거나녀자고음이거나 혹은 중음이거나 모두 선률과 피아노반주곡을 함깨 써야 합니다.피아노 반주와 노래소리는 하나로 어울…(2011-07-23 18:33:43)


산과 물의 웨침-1 인기글 산과 물의 웨침-1 -항일전쟁시기 계림음악제작 론평 계림관광고등전문학교 교수 왕소곤 (가사) “고향” 장범 작사 륙화백 작곡고향! 내가 자라난 고향너는 천당이였네.맑은 강물 흘러가고 버드나무 춤추고낮다란 언덕엔 수림이 무성하고봄빛 푸른 초원에선 소와 양떼 뛰놀고가을엔 해빛이 찬란하였네.월야엔 배타고 호심에서 노니는데장엄한 절당엔 석양빛이 남아있네.지금은 변했네 모두 변했네.야수…(2011-07-23 18:29:10)
게시물 검색

Copyright © 2005 인터넷길림신문 all rights reserved. 吉ICP备07004427号

本社: 長春市綠園區普陽街2366號 Tel: 0431-8761-9812 分社: 延吉市新華街2號 Tel: 0433-253-6131

記者站: 吉林 (0432) 2573353 , 通化 (0435) 2315618 , 梅河口 (0448) 4248098 , 長白 (0439) 8220209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