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吉林

욱달부전기-몰락(하) > 문화유물

본문 바로가기
전체인기글

욱달부전기-몰락(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1-11-18 13:07| 조회 :3,445| 댓글 :0

본문

                       욱달부전기-몰락(하)


1920년 봄,욱달부는 그때 동경제국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그는 자기의 처소에 친구 몇몇을 불러들였으 며귤도 한봉지 사놓았습니다.후에 이일을 회억하면서 귤집회라고 이름을 달았습니다.그와 익숙한 두친구인 성방오와 장자본은 다른 한사람인 전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긴시간 기다렸지만 결국 전한이 오지않았습니다.이를 력사에서 <창조사>의  첫회의라고 했습니다.

<창조사>는 <5.4>문학이 발발하던 20년대,중국의 두개의 중요한 문학단체중의 하나였습니다.사실,당시의 <창조사>에 또 한분의 중요한 기획인이 있었는데 바로 곽말약이였습니다. 욱달부와 곽말약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있는 사이였는데 바로 그가 금방 일본에 와서 예과반에서 공부할 때 서로 만나게 되였던것입니다.곽말약의 회억에 의하면 제일 먼저 온양한 것은 그가 장자평과 함께바다가에서 산책하면서 중국내지의 문학연구회에 대해 거론하고 원항나비파의 불만을 토로하면서 문학단체를 창립할 준비를 한것이였습니다.

1921년에 곽말약은 상해에 돌아왔습니다.그당시 상해에는 태동서국이 있었는데 사장은 조남공이였으며 곽말약에게 잡지를 꾸릴 준비를 하게 하였습니다.이 조남구는 곽말약이 돌아왔지만 월급도 주지 않고 직무도 주지 않았으며 그저 얼마간의 보조금을 주면서 태동서국에 거주하게 했으며 준비사업을 오래동안 벌렸지만 잡지를 한부도 발간하지 못했습니다. 알다싶이 한개 문학류파의 성립은 몇가지 조건이 수요되는것입니다.

첫째,지향이 같은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둘째,작품을 써낼수 있어야 합니다.셋째,공동한 주장이 있어야 합니다.<창조사>는 바로 예술을 위한 예술이였습니다.넷째, 가장 중요한 조건인데 반드시 자기의 진지가 있어야 합니다.<소설월보>는 처음에는 북경에서 설립했으며 정진탁,빙심,왕통조,허지산,엽소균 등과  같은 많은 지성인들이 참여하였습니다.그리고 무엇때문에 반드시 상해상무서국의 심안빙을 참여시켜야 했을가요?심안빙의 수중에 <소설월보>가 장악되여있었기 때문이며 곽말약이 아직 인계받지 못했던것입니다.

1921년9월21일에 욱달부가 돌아왔습니다.돌아와서 짧은 시간내에 창발적인 예고를 발부했는데 바로 당시의 <시사신보>의 창설예고였습니다.개업하면서 그는 문화운동이 일어난후 우리나라의 신문예는 한두사람의 우상화에 의해 독점되였다고 호소했습니다.여러분들도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신문화운동의 우상은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분명히 로신이나 호적 혹은 문학연구회를 가리키는것이 아니였습니다.사실은 그때로부터 <창조사>는문학연구회와 대항적인 국면에 처해있었던것입니다.

20년대에 문학연구회와 창조사는 두개의 부동한 파벌이였습니다.곰곰히 돌이켜보면 이두 파벌은 절대로 서로 엇비슷한 세력이 아니였습니다. 무엇때문일가요?앞에서 말하다싶이 문학연구회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있고 대부분작가들이 기본상 여기에 포함되여 있었던것이며 후에는 파금이나 로사도 포함되여 있었습니다.앞에서 렬거한 수많은 사람들속에 창조사에 속한 사람이 있었을가요?사실 창조사에는 단 두사람뿐였는데 한사람이 욱달부이고 다른 한사람이 곽말약이였습니다.허나 이 두 사람은 신문학의 네개 령역에서 각기 두개 령역을 다루고 있었습니다.곽말약은 신시와 희곡이였고 욱달부는 소설과 산문이였습니다.

첫 총서에서 가장 중요한 두부의 작품이 바로 <녀신>과 <몰락>이였습니다.이듬해 27세의 욱달부는 원래 동경대학문학부에서 연구생으로 공부할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포기하고 동경대학 경제학학사를 얻어가지고 귀국한후에 창조사를 주최하였습니다.이시기에 <몰락>이 출판되였습니다. 금방 강의했지만<몰락>에 대해 사람들은 떠들썩하며 의론이 분분하였습니다.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당시의 사람들이 <몰락>에 대한 평론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첫번째는 별명이 아영이라 불리우는 전행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성적충동과 성욕생활은 청년남녀들의 필연적인 요구인것이며 열광적인 시기에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킬 방법이 없어서 결국은 억압적인 의도가 생기는것입니다.>이어지는 몇마디 말은 제 생각엔 여러 인터넷친구들도 많은 체험이 있을것입니다.<억압으로 인해 고민이 생기고고민으로 인해 비관에 빠지게 되며비관으로 인해 부득불 자신을 천박하게 만듭니다.이것이 우울과 고민입니다.>그러나 이는 일종 비평적인 설법에 속하는것입니다.

두번째 견해는 심종문의 평가입니다.이 보잘것없는 생활에서 이러저러한 감촉이 나타나는데 욕망적으로는 향상하려고 노력하며 실패한 후에는 후회를 하는것입니다.한 나젊은 독신 남자로부터 질박하게 탄백하는 방법으로 독자들에게 진술하는데 사람들은 모두 욱달부가 가련한 사람으로 여기였습니다.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것이며 명예, 금전, 녀인이 단합되여 외롭고 쓸쓸한 사람에 향해 공격을 가하는듯하였습니다.이 말은 젊은이들의 마음이 연약하다고 한것입니다.

텔레비앞에 있는 여러 젊은이들은 욱달부의 이말에 대해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명예도,금전도 없고 녀인도 자기를 거들떠 보지않으며 이들이 합쳐서 외롭고 쓸쓸한 자기를 공격하고 있으니 어찌 몰락하지 않겠습니까?>

세번째는 당시의 문단의 대가인 주작인였습니다.주작인은 후에 한간으로 되여 의기소침하게 되였던것입니다.주작인은 <5.4>시기에 로신과 함께 <5.4>문학의 기수였으며 당시에 <몰락>에 대한 평론문장 한편을 써냈습니다.주작인이 말하기를 불도덕적인 문학은 세가지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바로 혁명문학입니다.예수나 갈리레이 ,똘스또이에 관한 작품이 세상에 나올 때 모두 불도덕적인것이였으며 사실 이것은 가장 전형적인 혁명문학입니다.다음은 반금욕, 반위선문학입니다.바로 고의적인 금욕에 대해 전형적인 비판을 하는것입니다.

세번째는 비의식적인 문학입니다.바로 자기 절로는 의식못하고 진실하고 성심으로 작품을 쓰는것을 말합니다.주작인은 물론 다른 세가지 부류가 있다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진정으로 불도덕적인것이라고 하였습니다.바로 평화를 파괴하는것,죄악을 찬미하는것,비인도주의적인 폭행인데 오늘날의  설법으로는 공포주의적인것입니다.사실 오늘에 와서 보면 주작인의 이 분류는 일정한 도리가 있는것입니다.그렇다면 <몰락>은 어느 부류에 속할가요?주작인은 <몰락>은 뚜렷하게 두번째의 비의식적인 단정하지 못한 부류에 속한다고 했습니다.그의 유명한 평론을 보면비록 저질스러운 행위는 있지만 비도덕적인 성질은 없다고 하면서그의 가치는 비예술적으로 자신을 전시하고 의식적으로 승화된 색정적인것을 써낸데 있는것이며 이것이 바로 진실과 보편의 소재인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제가 대학에서 교학을 하는 과정에 더우기는 홍콩의 교회에서 자라난 순진한  녀학생을 보면서 그들이 만일 <몰락>을 보았다면필연코 나한테 이러저러한 질문을 들이댈것입니다.이것이 황색적인것이 아닌가고 말입니다.황색이나 예술에서 색정적인것을 어떻게 구분할수 있겠습니까?리론상에서는 명확하게 말할수는 있겠지만그 동기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술의 심도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인성을 해부해야 할것입니다.사람의 성에 대하여 썼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일것이며 반대로 오락을 목적으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호감을 얻으려 하고관중의 눈길을 모으게 하면서그 어떤 판로를 겨누었다면 그것은 곧 색정적인것입니다.만일 이 리성적인 분류법에 아직도 곤혼이 남아있다면 여기에 한해서 더 간편한 테스트가 있는것입니다.여러분들이 주시해야 할 것은 소유의 간편한 테스트도 모두 불완정하다는것입니다.그러나 이러한 간편한 테스트가 기본상 십상팔구는 맞는다는것입니다.

바로 한가지 작품에서 색정적인 묘사를 보면서 본후에 쾌락적인가 아니면 고통스러운가를 체크하는것입니다.만일 쾌락적이였다면 이것이 바로 색정적인것이며 만일 고통스러운것이였다면 이것이 바로 예술인것입니다.주작인은 <몰락>은 비록 예술품이지만 소년들이나 몽매한 사람들에게는  그리 적합한것이 아니며 아동들한테는 유익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주작인이외에도 가장 많이 찬미하고 지지한  사람은 곽말약입니다.곽말약이 그에 대한 찬미는 매우 정채로왔습니다. 곽말약은 욱달부가 청신한 필법으로 중국의 시들어버린 사회에서 한가닥의 봄바람으로 당시의 무수한 청년들의 마음을 불러일으키였으며 춘풍으로 무수한 청년들이 깨여나게 함으로 하여 도학가들은 모두 무서움에 떨었으며 그의 대담한 자아적인 폭로는 수천수만년의 배일속에 감춰졌던 사대부의 허위에 대하여 폭풍우마냥 완전히 쓸어버렸으며 일부 도학가들중의 위선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으 며나아가서 격노하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무엇때문일가요?바로 뼈에 사무치는 솔직함이 있음으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가상으로 인한 고난을 감수하게 했으며 일부사람들이 진실함으로 하여 다른사람들의 허위를 막을수 있었다고 했습니다.이것이 바로 곽말약이 욱달부에 대한 당시에는 가장 큰 지지였던것입니다.대부분 상황에서 욱달부는 매우 희소하게 자기의 작품을 해석했습니다.그러나 <몰락>에 대해서는 그는 세번이나 매우 중요한 해석을 하였습니다.좋습니다.다른사람들이 의론이 분분한 상황에서 욱달부는 <몰락>에 대해 어떻게 해석했을가요?

대부분 상황에서 욱달부는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별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허나 <몰락>에 대서 세번이나 말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것입니다.

첫번째는 그가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이 소설은 한 병든 청년의 심리를 묘사한것이라 하였습니다.어떻게 보면 한 청년의 우울증을 해부한것이며 그속에는 현대인들의 고민도 포함되여 있었던것입니다.바로 성적인 요구나 령혼과 육체의 충돌인것입니다.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 묘사는 실패한것이라 하였습니다.이것이 첫번째 평가입니다.

몇년이 지난후인 1927년의 어느날욱달부는 이 소설은 완전히 유희적인 필묵이며 진정한 생명이 내재한것이 아니며 잘 다듬어진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1921년에 그가 이 작품을 쓸 때는 무명소졸에 불과했으며 이 작품은 출세작이였기에 그는 별로 겸손한것도 없었습니다.1927년에 그는 이미 이름을 날렸고 작품전집도 내놓았으며 욱달부의 명성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그래서인지 그는 자기는 아무것도 없으며 작품이 그닥지않다고 사양하였던것입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1932년인데소설을 발표한지 11년이 지난후입니다.1932년에 중국에서는 어떤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는지에 대해서 욱달부는 <몰락>을 해석하면서 잘 피력했는데 고국의 막중한 대륙이 이국의 굴욕을 받고 있는것을 눈앞에 보고있다고 했습니다.그래서 이 작품은 전혀 기력이나 용기가 없이 애절한 비명으로 차넘친다고 했습니다.여러분들도 내가 무엇때문에 이 세 단락을 읽었는지 알수있을것입니다.

첫째,한부의 작품은 부동한 각도에서 해석을 가할수 있으며 성적인것도 있고 민족주의도 포함되여 있으며마치 오늘날의 인터넷에서 자유로 언론을 발표하듯이 성적인것과 민족주의를 모두 볼수가 있는것입니다.

둘째,문학작품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커가는것입니다.시작할 때는 육체와 령혼의 충돌을 썼지만 일본인이 동북을 침략했고 사회좌익련맹이 성립되여 좌익사상이 의식형태의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 욱달부는 이 작품을 높은 애국주의 경지에 끌어올리였습니다.이 작품은 이후의 현대문학사에서 제가 방금 말하다싶이 바로 <5.4>시기의 애국주의주제로 부상하였던것입니다.그래서 작품은 문학사의 발전과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부단히 성장하는것입니다.이런 현상은 어디에나 존재하는것입니다.저는 <몰락>으로만 례를 드는데 <몰락>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을가요?

제가 보기에는 그는 말하고 싶은것을 다 말했던것입니다. 청년들의 성적인 고민이 있을뿐만아니라 민족주의의 주제도 있었으며 아울러 이 민족주의 주제는 시대의 발전에 따라 더욱더 중대하게 변화되여갔던것입니다.그러나 오늘날에 한개 작품이 민족주의정서가 중요할지현대청년들의 우울증이 더 중요할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것입니다.그 당시에는 현대청년들의 우울증에 대해 쓰는것이더 중요할수도 있을것입니다.오늘날에도 이러한 것들을 써내는것도 더 중요하지 않을가요?

여러분들이 더 사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사랑할수 없고 부득불 사랑해야 함을 동시에 만끽하면서 욱달부는 더욱 몰락적인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욱달부는 <몰락>을 발표한후에또 한편의 매우 중요한 작품인<조라행>을 써냈습니다.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부인인 손전을 소재로 썼던것입니다.여러분들도 알다싶이 욱달부는 1931년에 일본에 갔으며1922년에 귀국하였습니다.전후로 거의 십년을 일본에서 보냈던것입니다. 일본에 간지 4년이 지난후그의 모친의 지령으로 그는 고향인 부양에 돌아와 손란파란 녀인과 혼인을 정하였습니다.

이 녀인은 구문체 시도 지을줄 알고있어 일정한 문화수준도 갖추고 있었지만 전족이였습니다.욱달부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의 형상을 이렇게 형용했습니다.머리에는 비녀를 꽂고 몸에는 치마를 두르고 있었으며 용모는 그다지 잘 생기지는 못했지 만어느정도 풍류적인것도 내 비치여 받아들일만한 우점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이렇게 처음 대면하면서용모가 그닥지 않다고 하였으며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그는 질질 끌면서 결혼할념을 하지 않았으며 일본에서 필사적으로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억하고 있겠지요?그때부터 미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으며 후에는 미인이든 말든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으니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것입니다.그래서 마지막으로 3년을 더 지낸후1920년에 다시 귀국했습니다.그는 그녀의 이름을 손전이라 고쳐주었는데 향초라는 전이였습니다.허나 그는 전반 례식을 간소화했으며 결혼한후 그는 형님한테 편지를 보냈습니다.편지에서 그는손씨는 문장도 지을줄 알고 하니 집에다 두고 모친의 서기노릇을 시키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습니다.여러분들은 여기에 대해 사고해볼 필요가 있는데 해외에서 거류하다가 되돌아와 새색시와 결혼하고 연후에는 그녀를 모친의 서기노릇을 시켰습니다.

이 서기는 지금의 높은 직위의  서기가 아니라 장부를 기재하는 서기를 말하는것입니다.어떤 사람들은 로신에게 첫번째 부인인 주안이 어떤가고 물었습니다.저는 여기에 대해 고증해보지 못했는데 만일 틀린곳이 있으면 시정해주기 바랍니다.듣는바에 의하면 로신이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추리가 매우 분명했다고 합니다.그의 대답은 <아닙니다.그는 나의 부인이 아니라 저의 어머니의 며느리일뿐이다.>고 했습니다.

이는 욱달부의 태도와 매우 비슷했습니다.이들은 일찍이 부친을 잃고 모친의 슬하에서 자라났으며 이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이러한 문제가 있는것입니다.그들의 첫혼인은 모두 부모들이 지정해준 혼인으로서 마지막에는 몇가지 결과를 초래하게 되였습니다.첫째는 로신과 주안, 욱달부와 손전등과 같은것입니다.물론 로신은 주안과 달랐습니다.로신은 주안과 한방을 쓰지 않았던것입니다.

둘째는 욱달부와 같이 그는 손전과 세 아이를 낳았던것입니다. 비록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입니다.그는 집에서 매우 사납게 굴었지만 한편으로 그녀를 가엽게 여기였던것입니다.

세번째 정황은 어떠했을가요?호적을 실례를 들수 있는데 호적의 부인은 전족이였으며 이름은 강동수라 했습니다.호적은 이면에서 매우 교묘하였는데 그는 옛도덕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후에 미국대사로 있을 때자기의 전족부인을 데리고 도처에서 출면하기도 하여 미국사람들은 그를 매우 흠모했습니다.호적은 서양멋이 넘쳤으며 늘 양복을 입고 다니고 영어도 잘 했습니다.이러면서도 전족부인을 데리고 있으 니미국사람들의 안목에는 그가 매우 도덕적이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고 여기였던것입니다.호적자신도 자기는 작은 손해로 큰 덕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후에 장개석의 신생활운동에서 호적을 실례로 <오강사미>를 제창하였습니다.당시에는 <오강사미>라 하지 않았지만 총적으로 심령미의 대표라고 하였던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식혼인에서 <5.4>시기 작가들은 부동한 길을 걸었던것입니다.욱달부가 걸어온 길을 보면 그는 안해를 집에 두고 서기노릇을 하게 했으며 돌아와서는 아이 셋을 낳았던것입니다.사랑하지 않지만 부득불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였습니다.이것이 그의 <조라행>입니다.즉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입니다.

동시에 욱달부는 이보다 더 몰락적인 소설을 썼는데 바로 <망망한 밤>과 <가을버들>입니다.그가 안휘에 가서 교편을 잡으면서 그가 안휘에서의 일들을 써냈던것입니다.한두가지 실례를 들면 욱달부가 어느 정도로 몰락되였는지 알수있을것입니다.

한개실례는 바로욱달부가 <망망한 밤>에서 주인공이 자기와 흡사하다고 했으며 물론 꼭 그와 같다고는 할수없지만 성적인 고민이 매우 많은 상황에서그는 한 가게의 녀점원을 좋아하게 되였습니다.예전처럼 그는 감히 이 녀점원과 말을 건네지도 못했으며 후에 그는 이 가게에 뛰여가서 그녀한테서 손수건 하나와 바늘 한개를 샀습니다.그는 매우 흥분되여 집으로 돌아와이 바늘로 자기의 낯을 찔러 피가 나게 하였으며 다음에 그 손수건으로 붉은 피를 닦아 내면서 비할바없는 고도의 흥분에 빠지게 되였던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욱달부가 쓴 감정인것입니다.

둘째,그는 화류골목에 가서 타락된것입니다.정신상태가 좋지 못할때면 그는 화류골목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이것이 욱달부가 타락되여서 그랬을가요? 아닙니다.그는 화류골목에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어느 녀자가 사람들의 인기가 제일 없고나이도 제일 많고가장 못생겼는가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해당이라는 녀자를 소개해줍니다.그는 좋다고 하면서그 녀인을 찾아오라고 합니다.그런후에 그는 다른 일을 하지않고 함께 탁상앞에 앉아서차를 마시며 한담합니다.

한담속에서 그는 자기의 처지도 그녀처럼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고 지위도 매우 낮다고 했습니다.자기는 학교에서 기시를 많이 받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쓸모없이 취급되여 매우 우울하고 고민스럽다고 하였습니다.이렇게 이들 둘은 서로의 고민을 하소연합니다.이것이 바로 욱달부의 <망망한 밤>입니다.

소설의 제목과 상부한 내용을 담고있습니다.<망망한 밤>과 <가을버들>은 기본상<몰락>의 주선을 따라서 이루어졌으며 성적고민의 고배로 인해 몰락하고 우울해지는 과정을 묘사했으며 허나 그냥 그렇게 계속되는것이 아니라 인츰 전환되는것입니다.욱달부는 창작에서 성적고민으로부터 삶의 고민에로 전환하는것을 중심으로 하였던것입니다.1923년은 욱달부의 작품에서의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였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문화유물 목록

Total 19건 1 페이지
문화유물 목록
욱달부전기--달부의 죽음 인기글 욱달부전기--달부의 죽음 전기욱달부는 오늘이 마지막 집 “달부의 죽음”입니다. 1942년에 일본침략군이 싱가포르를 진공하자 사람들은 도망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욱달부는 호유지, 왕임숙 등 28명과 함께 싱가포르를 떠나 네덜란드의 작은 섬으로부터 수마트라섬에 도착하여 자그마한 바예라는 곳에서 일을 봤습니다. 그때 욱달부는 변명을 하고있었습니다. 조렴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수염을 길러서 사람들은 그를 조수염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동복을 입고 바예로 근무하러 가는 길에 …(2011-11-18 13:22:19)
욱달부전기—혼인비극 인기글 욱달부전기—혼인비극 전번 집에서 우리는 욱달부가 왕영하를 사랑하다가 끝내 성공하여 자기의 “일기9종”을 출판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기9종”의 주선은 왕영하를 사랑하는것입니다. 1928년에 그는 끝내 왕영하와 결혼을 했습니다. 왕영하는 처음에는 아주 신중한 태도였습니다. 욱달부는 원래의 안해를 멀리 떠나 유럽에 가서 결혼식을 치르자고 했습니다. 모든것이 다 뜻대로 된후 왕영하가 말했습니다. 첫째, 유럽에 가지말고 그 돈을 남겼다가 집을 사고 둘째, 시골에 …(2011-11-18 13:16:39)
욱달부전기-- 사랑에 빠지다 인기글 욱달부전기-- 사랑에 빠지다 1927년 1월14일 오전10시 좌우에 욱달부는 프랑스조계지로 가서 손백강이라고 하는 고향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며칠전에 내산서점에서 그 친구를 만났댔는데 특별하게 친한 친구도 아니였습니다. 때문에 이번의 만남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습니다.그러나 욱달부는 이번 만남이 자기의 후반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문학사를 연구하거나 문학서적을 읽은 사람이면 다 알지만 그날 손백강의 집에서 욱달부는 한 녀인을 …(2011-11-18 13:13:39)
욱달부전기--춘풍만취 인기글 욱달부전기--춘풍만취 “봄바람에 취한 밤(욱달부대표작1923년 7월에 창작) ”은 욱달부의 단편소설인데 아주 유명합니다. 욱달부가 성고민으로부터 생활고민으로 넘어가는데 이 작품은 그 전절점이 됩니다. 소설은 아주 짜릅니다. 모두 네개 부분으로 되여있는데 첫번째 부분은 그가 이사하는 장면입니다. 아주 더럽고 란잡한 1층에서 아주 작은 층집의 다락방으로 이사하는데 다락방도 두칸으로 나누어서 창문이 있는 방에는 가난한 녀성로동자가 들고 문인인 남자주인공은…(2011-11-18 13:10:09)


욱달부전기-몰락(하) 인기글 욱달부전기-몰락(하) 1920년 봄,욱달부는 그때 동경제국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그는 자기의 처소에 친구 몇몇을 불러들였으 며귤도 한봉지 사놓았습니다.후에 이일을 회억하면서 귤집회라고 이름을 달았습니다.그와 익숙한 두친구인 성방오와 장자본은 다른 한사람인 전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긴시간 기다렸지만 결국 전한이 오지않았습니다.이를 력사에서 &lt;창조사&gt;의 첫회의라고 했습니다.&lt;창조사&gt;는 …(2011-11-18 13:07:08)
욱달부전기-몰락(상) 인기글 욱달부전기-몰락(상) 허자동 / 홍콩령남대학 교수 오늘부터 욱달부의 전기를 강의하겠습니다.우리는 &lt;5.4&gt;신문학의 첫 단편소설인로신의&lt;미치광이 일기&gt;를 알고 있을것입니다.이는 1918년 &lt;신청년&gt; 간행물에 등재된 작품입니다.허나 제1부의 백화문으로된 단편소설집은 욱달부가 편저한 &lt;…(2011-11-18 13:04:10)
《역경》과 인생(하) 인기글 《역경》과 인생(하) 《역경》의 눈으로 보면 평상시 우리의 모든 언어행위가 다 도리에 맞습니다.우리가 모든 사물을 세토막으로 보는것도 《역경》에서는 삼획괘를 그렸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리지 않았을뿐입니다. 일을 처리할 때 우리는 간단한것을 보면 복잡화합니다. 지하의 도랑에 배를 번질수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잡한것을 보았을 때는 간단화하여 처리하는데 이렇게 하는것이 옳다고 봅니다. 복잡한것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면 나중에 해결할 방법이 없게 되고 간단한것을 …(2011-11-16 07:38:14)
《역경》과 인생(중) 인기글 《역경》과 인생(중) 해설: 《역경》의 철리는 음양일체입니다. 우리가 보아온 태극도처럼 음속에 양이 들어있고 양속에 음이 들어있습니다.《역경》은 중국철학사상의 원천이며 로자사상이든 공자사상이든 모두 《역경》에 토대하여 형성되였다고 증사강교수는 보고있습니다. 하다면 고대의 성현들은 어떻게《역경》을 해독했는지 들어봅시다.증사강: 중국의 모든 철학은 다《역경》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공자가 중인이상의 사람을 갈라보았는데 그 중인이상의 사람이 바로 로자입니다. 로자는 지혜가…(2011-11-16 07:36:41)
《역경》과 인생(상) 인기글 《역경》과 인생(상) 《백가강단》—경전을 읽다 해설(남): 《역경》은 중국에서 가장 유구하고 가장 신비한 경전저작입니다. 사람들은 《역경》을 심오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몹시 알고싶어합니다. 몇천년이 흐른 뒤 변화다단한 현대사회에 이르러 이 유구하고 신비한 경전이 일부 사람들이 점을 보는 도구로 리용되고있습니다. 대만학자 증사강교수가 말씀하기를《역경》은 중국철학사상의 원천이…(2011-11-16 07:34:26)
라포박 고분의 비밀 (하) 인기글 라포박 고분의 비밀 (하) 2005년 음력설전에 우리는 또다시 소하묘지로 왔다. 소하고고사업에 참여한 길림대학의 몇몇 전문가들도 우리와 같은 차를 타고 왔다. 이미 청리공작을 마친 소하묘지는 고고발굴단계에 들어섰다. 고고대의 일군들은 이미 사막에서 다섯달동안 일했다. 소하묘지에 도착하자 바람으로 전문가들은 일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우선 묘지표층에서 청리해낸 문물에 대한 고고감정을 시작했다. 표본을 수집한후 실험실로 가지고가서 DNA기술검측을 할 준비를 했다. 대량적인 고고연구공작은 반드…(2011-05-31 09:45:25)
라포박 고분의 비밀(상) 인기글 라포박 고분의 비밀(상) 신강의 천산남쪽기슭을 지나면 타크라마간사막에 들어서게 된다. 천여년래 여기에 들어온 외부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18세기부터 수많은 외국탐험가들이 여기를 찾았다. 그들은30여만평방킬로메터에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사막에는 30여개의 성보뿐만 아니라 비단의 길에 있었던 수많은 재부가 매장돼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세계적으로 고고학의 흥기와 더불어 서역에 대한 탐험도 여기서 조용히 시작됐다. 루란, 니야 등 력사유적지도 련이어 발견됐다. 21세기에 와서70여년…(2011-05-31 09:19:36)
중국의 세계유산 (하) 인기글 중국의 세계유산 (하)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에는 중국고대문명과 신앙의 상징인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태산입니다. 중국에서 고대 제왕들은 등극초기 태평성세를 바라고 태산에 와서 천지에 제를 지내고 소망을 빌었습니다. 이렇게 태산에 올라 축제를 올린 제왕만이 백성을 통치할수 있는 권력을 행사하게 했습니다. 중국인은 등산과 물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마음속의 희노애락과 자연의 산수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중국산수문화의 풍부한 내연을 만들었습니다. 태산의 돌을 다듬어 만든 석각은 근 천여개에…(2011-05-18 09:08:28)
중국의 세계유산 (상) 인기글 중국의 세계유산 (상)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은 만리장성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시황은 사분오열된 전국시대를 결속짓고 기원전221 년에 중국력사에서의 제일 첫번째 봉건제국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는 원래의 북방장성을 이음과 동시에 장성을 보수하고 확건시켰습니다. 이로부터 장성이 형성되였습니다. 그 이후 력대의 조대로 내려오면서 2000여년간 끊임없이 보수와 수건을 하여 길이가 5천만메터에 달하게 되였습니다. 진시황이 건립한 제국이 얼마나 흥성…(2011-05-17 09:46:06)
음력설의 진미---풍속 인기글 음력설의 진미---풍속 조 형 조형은 학자이며 연산출판사의 주필입니다. 주요하게 중국문화사 북경사와 희곡사 등 령역의 연구에 종사합니다. 주요저작으로는: 《로주만필》《수장쇄담》《구외담설》입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선 여러분들에게 늦게나마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정월 초이레입니다. 이전에 이런 한마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설을 기다리다가…(2011-03-14 10:08:48)
음력설의 진미 ---년화 인기글 음력설의 진미 ----년화 송 조 린 송조린은 중국국가박물관의 연구원이며 중국민족고고학의 일인자다. 저작으로는《중국원고문화》《중국전통명절》《녀아국친력기》등이 있음. 무엇을 년화(年画)라고 할가요 간단하게 말…(2011-03-11 15:21:10)
게시물 검색

Copyright © 2005 인터넷길림신문 all rights reserved. 吉ICP备07004427号

本社: 長春市綠園區普陽街2366號 Tel: 0431-8761-9812 分社: 延吉市新華街2號 Tel: 0433-253-6131

記者站: 吉林 (0432) 2573353 , 通化 (0435) 2315618 , 梅河口 (0448) 4248098 , 長白 (0439) 8220209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