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달부전기-- 사랑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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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1-11-18 13:13| 조회 :4,600| 댓글 :0본문
욱달부전기-- 사랑에 빠지다
1927년 1월14일 오전10시 좌우에 욱달부는 프랑스조계지로 가서 손백강이라고 하는 고향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며칠전에 내산서점에서 그 친구를 만났댔는데 특별하게 친한 친구도 아니였습니다. 때문에 이번의 만남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습니다.그러나 욱달부는 이번 만남이 자기의 후반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문학사를 연구하거나 문학서적을 읽은 사람이면 다 알지만 그날 손백강의 집에서 욱달부는 한 녀인을 만났는데 이름이 왕영하였습니다.
왕영하는 그때 19살이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아주 곱게 생겼다고 했습니다. 욱달부의 그날 일기에서도 그렇게 쓰고있습니다.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항주의 왕영하녀사를 만났다. 나의 마음은 그녀로하여 혼란해졌다. 이 일을 극력 추진시켜야겠다. 나는 그녀와 영원한 친구로 될것이다. 점심에 나는 그들을 청해서 술을 마셨다. 난 취했다. 아, 사랑하는 영하! 난 지금 여기서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도 지금 저쪽에서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욱달부가 그날 쓴 일기입니다.
그외에 또 한마디가 있습니다. “ 래일부터는 정정당당한 일을 하면서 힘껏 노력할것이다.” 그후 왕영하는 처음 욱달부를 만나던 정황을 회억하였습니다.“ 그이는 키는 크지 않았으나 어딘가 자연스럽고 대범한 풍도가 있었어요.그때 그이는 회색나는 양털긴옷을 입고있었지요. 양털긴옷에 대해 잠간후에 다시 이야기해드리겠어요. 발에는 흰양말에 까만 신을 받쳐신었고 머리는 오래동안 깎지않았는지 좀 긴축이였고 이마가 넓고 눈이 작았는데 아주 여위여 보였어요.”
왕영하는 그때 중학시절에 배운 로신의 “광인일기”. “아큐정전”과 욱달부가 쓴 “몰락”을 생각했답니다. “몰락”에 대한 왕영하의 인상이라면 처음 읽을 때 좀 거북스러웠답니다. 지금 그 작자와 마주앉자 호기심이 들었답니다. 후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회억록과 전기를 썼는데 왕영하와 욱달부가 한창 신이나서 이야기하고 있을때 주인 손백강의 부인이 들어와서 욱달부에게 부인은 잘 있는가고 물어보아 좋던 분위기를 깨놓았다고 쓰고있습니다. 그래서 왕영하의 열정이 좀 식었답니다.
손백강의 말에 의하면 욱달부는 세상실정이나 형편에 대해 잘 모르거나 경험이 없는 사람인데 그날은 특별히 사치스럽게 그들을 끌고 차를 타고가서 점심을 사고 술을 마셨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칼등에 가서 영화를 봤는데 영화는 그닥 재미없었답니다. 저녁에는 도락촌에 가서 또 밥을 샀답니다. 그런데 욱달부의 일기에는 오후에 창조사에 나가서 정사를 봤다고 씌여저 있습니다.
칼등은 지금 다 허물어버려서 없는데 아주 가석합니다. 후에 “일출”의 첫상영식도 칼등에서 했는데 바로 장애령의 옛집이 칼등앞에 있었습니다. 장강극장이라고 했지요. 국제호텔 옆이였는데 지금은 허물어서 없습니다. 그 극장은 아주 중요한 극장이였습니다. 이튿날에도 욱달부는 또 손백강네 집에 가서 함께 밥을 먹자고 했습니다.
그날 밤에 그는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 “ 왕영하녀사가 나한에 술을 따라주었다. 오늘밤은 정말 미칠지경으로 기쁘다. 난 진정으로 이번 일이 성사되기를 바란다.”그리고 16일에는 “해내야 한다. 용기를 내서 해내야 한다”고 일기를 썼습니다. “해내야 한다”는 말뜻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다른 뜻이 없습니다. “돈은 이미 다 써버렸다. 오늘 오전에는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소설을 썼다.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 빨리 소설을 써서 원고료를 받아 왕녀사에게 생일선물을 사주어야겠다.”그 원고료는 이틀에 다 없어졌습니다.
그 다음날에 그는 상해예술대학 교장 주진호네 집을 찾아갔습니다. 주교장네 집은 왕영하가 들어있는 집 옆집이였습니다. 17일은 사흘째 되는 날이였는데 욱달부는 손백강네 집으로 다시 가기가 민망해졌습니다. 한것은 손백강의 태도가 좀 랭담해졌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벽을 사이둔 주교장네 집에 가서 왕영하를 불러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18일에는 또 상현방에 가서 왕영하를 찾았는데 그때는 왕영하도 좀 랭담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는 밖에서 맴돌면서 깊은 밤이라 감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날 일기에 그는 그날 밤은 아주 추웠다고 썼습니다. 19일이면 왕영하를 만난지 닷새가 되는 날이였는데 그는 일이 상서롭지 못하게 돌아간다는 감을 느꼈습니다. 그번 련애는 또 그로서 끝이 났습니다. “아, 고독한 인생, 가련한 내사랑이여!”처음으로 왕영하를 보는 순간 욱달부는 한눈에 정이 들었습니다. 감정의 향기와 갈망의 정감이 하나로 되여 그는 왕영하를 미친듯이 사랑했습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열두살이나 더 많은 가난한 남자에게 왕영하가 자기의 사랑을 줄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욱달부는 또 어떻게 본처와의 감정을 처리하겠습니까?
욱달부는 그때 이미 31살이였습니다.욱달부는 그때 학교에 남아서 교학을 했댔습니다. 그는 북경, 광주, 무창, 상해, 일본, 동경, 오사까 등 많은 곳을 다녀보았고 많은 작품을 써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19살 난 처녀애에게 반해서 하루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자기의 일생을 결정했겠습니까?후에 안 일이지만 그는 그때 진짜로 자기의 일생을 결정했습니다. 잘 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는 먼저 말하지 말기로 하겠습니다.
두번째 문제는 방금도 말했지만 욱달부가 입은 긴 옷입니다. 그가 처음 왕영하를 본것은 14일인데 그 긴 옷은 13일에 그의 안해 손전이 북경에서 그에게 부쳐보낸것이였습니다. 그날 욱달부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 오늘 손전이 긴옷을 보내왔는데 감사했다. 나는 그 옷을 입으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 가련한 녀성노예에게 보답할 것인가?”여기에서 가련한 녀성노예라는 말을 기억해 두십시오. 욱달부는 보답할 방법을 생각하다 못해 북경에 가서 손전을 끌어안고 한바탕 울어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1933년에 그 일기를 다시 발표할 때 “끌어안고 한바탕 울어보리라고 생각했다”는 부분을 “ 돈을 벌어서 돈이나 부쳐보내리라고 생각했다”고 고쳤습니다. 왜서 고쳤겠는가는 이제 돌아가서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며칠후의 일기를 보면 그는 실련을 한후 또 4 마로에 가서 접객업으로 살아가는 녀자들과 함께 아편을 피웠습니다.이 대목을 보면서 저는 아주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모순속에서 살아갈수 있단 말입니까? 거의 같은 시간에 한쪽으로는 미친듯이 련애를 하고 한쪽으로는 집을 생각하고 또 한쪽으로는 들풀을 뜯으려고 했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정말 이런 일이 있을수 있고 이런 사람이 있을수 있는가 하는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이런 사람들의 복잡한 심리모순을 표현할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것입니다.
저는 홍콩에서 교학을 할 때 학생들, 특히는 녀학생들에게 한가지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댔습니다. 만약 어느날 유명한 남자작가가 갑자기 18살짜리 처녀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묻고나서 어느 작가를 례로들어 말하려 했댔으나 끝내 례를 들지못했습니다. 그리고 비슷하게 둘러리를 쳐서 말할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어느 작가 이름을 대겠습니까? 막언, 여화, 가평요, 왕몽, 장현량을 대겠습니까?
저는 갑자기 아주 간단한 사실을 발견했는데 오늘 욱달부가 없다는 것이였습니다.욱달부는 미친듯이 왕영하를 사랑했습니다. 그때 왕영하는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바로 제가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던 그 문제입니다. 만약 한 19살 난 녀학생, 온주에서 방금 교학을 하기시작한 녀학생이 이런 문제에 부딪쳤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왕영하를 데리고 온 욱달부의 친구 손백강은 욱달부가 가정이 있는 사람이기에 그만 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욱달부가 랑만적이기는 하나 생활이 퇴페적이여서 오늘은 미친듯이 사랑하지만 후에는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왕영하는 그때 제일 고려한것이 욱달부가 이미 결혼한 몸이라는것이였습니다.녀자의 각도에서 말한다면 무엇부터 보겠습니까? 재산? 우리가 이미 알고있지만 욱달부는 이틀이면 돈을 다 써버립니다. 년령? 12살이나 차이가 납니다. 아니면 재간? 재간이 그렇게 중요할가요? 가장 중요한것은 여론이랍니다. 다시 말하면 주위의 사람들이 어떻게 볼것인가 하는것입니다.
회억에 의하면 그때 손백강이 왕영하에게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었답니다. 그러니 왕영하가 머리를 숙이고 욱달부가 불쌍하다고 말했답니다. 그러니 손백강이 생각이 있는것 같은데 그럼 사상준비를 잘 하라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왕영하가 그렇게 위대하다면 욱달부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의 가정마저 용납할수 있는가고 더 물었답니다. 그러니 왕영하는 부모들이 동의하지 않을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손백강은 그럼 빨리 집으로 가라고 해서 왕영하는 항주로 돌아갔답니다.
비록 욱달부에 대한 련민의 정은 있었지만 가정의 압력이 두려워서 왕영하는 항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 욱달부의 미친듯한 사랑을 피했습니다.그런데 욱달부가 그만두려 했겠습니까? 그는 무슨 수단으로 왕영하를 설복했겠습니까? 제가 “일기 9종”을 보았는데 욱달부는 왕영하가 항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자 아침 5~6시에 상해 기차역으로 달려갔답니다.그는 역에서 왕영하를 붙잡으려 했는데 8시 기차를 기다리지 못하고 지체될가봐 기차에 올랐습니다. 그는 먼저 송강에 내려서 잠간 기다리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가흥에 가서 기다렸습니다. 가흥에서도 기다리지 못하고 끝내 항주로 갔습니다. 그는 항주역에서 왕영하를 기다렸습니다.
온하루를 기다렸지만 왕영하의 그림자도 못보고 혼자서 서호로 뛰여갔는데 그날 따라 아주 추웠답니다. 1월달인데 춥지않을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항주에서 하루밤을 묵고 이튿날 또 역전에 나갔는데 왕영하는 이튿날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하는수없이 욱달부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여 상해로 돌아왔습니다. 욱달부가 상해로부터 항주로 간 일은 우리가 후에 말하려는 내용의 제목이 됩니다. 욱달부는 왕영하를 사랑하기 위하여 상해에서 항주로 항주에서 상해로 왔다갔다했습니다.2월 25일이면 그가 왕영하를 처음 만나던 1월 14일에서 이미 40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때 욱달부는 왕영하의 편지를 받았는데 다시 상현방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였습니다. 그날 욱달부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정말 모순투성이였습니다. 이전에 욱달부는 정신이 나갈 정도로 왕영하를 사랑했는데 2월 25일에 다시 만났을 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욱달부는 27일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 영하가 주동적으로 접근하자 내가 오히려 걱정스러워났다.본처를 버리려는 생각이 동요하기 시작한것이다.”욱달부는 그전까지는 미친듯이 왕영하를 사랑했는데 왕영하가 그날 무슨 말을 했는지 동요하기 시작한것입니다.
일기에는 그냥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 나는 시시각각 영하를 잊을수 없고 또 시시각각 북경에 있는 아들딸을 잊을수 없다. 하느님은 왜 이처럼 많은 죄악을 나혼자한테만 들씌우는것인가?” 우리의 지금 말로하면 그 죄는 저절로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천하의 고통을 자기 혼자만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튿날 욱달부는 강남대려관에다 반날동안 방을 하나 잡았습니다. 방을 잡아서 뭘 하겠습니까? 왕영하를 불러다가 금후 계획을 서로 담론했습니다. 무슨 계획이겠습니까? 유럽에 가서 려행결혼을 하자는것이였습니다.그리고 자기가 쓴 책이 얼마만한 돈을 받을수 있다는 것과 장래에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등등의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후에 제가 욱달부의 편지를 보았는데 기본상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욱달부는 일이 순조롭지 않을 때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욱달부가 먼저 왕영하를 밀어낸 것입니다. 리유라면 네가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가하는것이였습니다. 첫째: 나를 못생겼다고 나무리고 둘째: 내가 돈이 없다고 나무리고 셋째: 내가 지위가 없다고 나무리는데 내말이 틀리는가 하는것입니다. 왕영하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이건 욱달부가 자기절로 한 말이였습니다.
후에 왕영하와 좋아지자 욱달부는 또 어떻게 말했겠습니까?첫째: 항주에 그냥 있지말고 상해로 올라와서 일감을 찾으라.그러면 내가 글을 가리칠 학교를 찾아주겠다. 북경대학도 좋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있으니 뒤문거래를 하면 동의할것이다. 둘째: 나한테 지금은 비록 돈이 없지만 이제 내 책이 나오면 원고료가 3천원은 될것이니 우리 둘이 유럽에 려행을 갈 돈을 얼마든지 된다. 그외에도 그는 많은 약속과 승낙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진이매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을겁니다. “당신한테 뭐가 있어요. 난 5원이면 돼요.”그때 남주인공은 좀 주저주저했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친듯한 련애중이여서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많을 승낙을 해놓은것입니다.
다른 한 전절점은 3월5일이였습니다.3월 4일에 욱달부는 또 려관을 잡고 왕영하를 오라고 했는데 그날 왕영하는 오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욱달부는 장편절교신을 썼습니다. 려관까지 잡아놓고 기다리는데 오지 않았으니 화가 얼마나 났겠는가는 가히 상상할수 있을겁니다. 그는 장편절교신을 쓰고 우리는 방법이 없다고 했으나 그닥 절대적이 아니였습니다. 그저 난 다시는 널 볼수 있을것 같지 않다는 등등의 감정이 상한 말을 많이 했을뿐이였습니다.
3월 5일에는 두사람이 인차 좋아졌습니다. 왕영하가 답복한것입니다. 3월 5일 일기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부터 나의 일생은 결정되였다.” 저는 랑만문인 욱달부를 아주 탄복하고 있었는데 아무렴 인생대사를 어쩌면 그렇게 소홀하게 결정할수 있었을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는 일기에서 우리 둘의 생활도로는 이날부터 결정되였다고 했습니다.
3월 7일 일기에 그는 왕영하와 처음으로 키스를 했다고 썼습니다. 키스를 한후 밤에는 뭘했겠습니까? 키스를 한후 두사람은 갈라졌답니다. 욱달부는 본처와 왕영하의 중간에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했습니다. 종당에는 왕영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손전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전승했습니다. 려관에서 욱달부는 왕영하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승낙하고 말았습니다.왕영하도 결심이 동요하여 두사람의 마음은 점점 더 가까와졌습니다. 욱달부가 왕영하를 안해로 맞아들일가요?
좋은 일에 말이 많은 법, 겨우 나흘이 지나서 왕영하는 욱달부의 일기를 보게 됐습니다.왕영하는 일기를 본후 대단히 화를 냈습니다. 왜서 화를 냈겠습니까? 왕영하는 왜서 우리 둘의 일을 이렇게 상세히 다 적어두었는가고 했습니다. 일기에는 키스장면을 썼는데 아주 오래동안 했다고 썼던 것입니다.우리가 알지만 욱달부는 원래 이런 문장을 잘 쓰지 않습니까? 그는 왕영하와의 키스장면을 아주 여실하게 일기에 써넣은것입니다. 그래서 왕영하는 그렇게 쓰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키스를 할수는 있어도 쓸수는 없다는것이였습니다.
두번째는 욱달부가 자기의 본처를 쓰면서 마음속으로 참회하고 주저한다고 쓴것입니다. 그리고 욱달부는 그 사이에 다른 녀자를 만난적이 없다고 했는데 서지마라는 녀인을 만나서 함께 영화구경을 한 일도 일기에 써넣었던것입니다.그는 일기에 뭐나 다 써넣었습니다. 심지어 4마로에 가서 접객업을 하는 녀자들과 아편을 피운 일까지도 다 써넣었던것입니다.
왕영하는 그런 일기를 다 보고 화가 나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욱달부는 왕영하에게 편지를 썼는데 편지에서 그는 자기가 쓴 모든 일기를 생전에는 절대 발표하지 않겠다고 보증했습니다. “일기 9종”은 1921년 9월에 출판한것인데 너무 잘 팔려서 열몇번이나 재판을 했습니다. 민국시기에 가장 잘 팔린 일기가 바로 “일기9종”입니다.
어렸을때 저는 련애편지를 쓰는것을 배우려고 로신의 “량지서”를 찾아보았는데 참고가치가 없었습니다. 로신은 “광평형”이라고 했는데 애정적인 문장이 전혀 없었습니다. 후에야 “일기 9종”을 발견하고 베꼈습니다. 그외에 또 서지마와 륙소만의 이야기도 알게 되였습니다. 3월 20일 그들은 영안회사 아래에 있는 대동려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욱달부는 원래 “몰락”경험이 있었으나 일기에다는 그날 밤에 함께 잤는데 키스를 많이 하고 최후의 방선은 다치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얼마나 랑만적입니까? 려관을 잡고 온밤 함께 있으면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니 이야말로 얼마나 진정한 랑만입니까? 그들이 려관에서 밤을 팬 이튿날인 3월 21일에 그가 일기에다 뭐라고 썼는지 알만합니까? 상해로동자들이 대파업을 거행하고 북벌군이 룡화에 왔다는 내용을 썼습니다. 그후 얼마 지나지않아 4.12 대도살이 시작되고 국민당은 많은 공산당원들을 살해했습니다.때문에 욱달부는 그때 대동란속에 있었는데 그는 정치대풍랑속에서 자기 개인감정의 대풍랑을 찾고있은것입니다.
4월 14일, 욱달부는 요청을 받고 항주로 가서 왕영하의 부모를 만나보았습니다. 그는 왕영하의 어머니를 보자 장모는 자기들의 일을 반대하지않을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전에 그는 왕영하에게 편지를 썼는데 편지에서 그는 영하의 어머니가 한사코 나더러 리혼하라고 하면 내 처지는 어렵게 된다고 썼던것입니다. 욱달부는 욕심이 대단했습니다. 처음에는 본처와 리혼을 하겠다고 말해놓고 왕영하를 얻게 되자 인제는 또 리혼을 하지않겠다고 한것입니다.
왕영하의 어머니는 거기에 대해 별다른 요구가 없었는데 다른 한 중요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왕영하의 외할아버지 왕이남이였습니다. 왕이남은 저명한 문인으로서 고체시를 잘 썼으며 욱달부를 높이 평가하고있었습니다. 욱달부가 왕이호를 만나자 그들의 혼인정황은 어떻게 되였겠습니까? 왕영하는 19살이고 학교를 방금 졸업했고 욱달부는 유명한 문인이고 31살이였습니다. 왕영하가 욱달부와 련애를 하자 왕영하의 외할아버지 왕이남은 욱달부를 서호에 초대하여 배놀이를 하면서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욱달부와 왕영하는 1927년 6월 5일에 항주에서 약혼식을 올렸습니다. 그전에 욱달부는 장개석을 욕하는 많은 글을 발표했습니다. 손백강의 말에 의하면 욱달부는 북경의 안해와 리혼을 하지 않았으나 왕영하와의 결혼도 정식결혼이였다는것입니다. 당시에는 두끝이 다 크다고 했는데 둘이 다 정식 안해라는 말입니다.
이야기를 끝내면서 저는 량실추가 한 말이 기억났습니다. 량실추와는 상관이 없고 량실추도 이 말을 욱달부를 놓고 한 말이 아닙니다.량실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하루만 안정된 생활을 하지 않으려면 손님을 청해 먹이고 일년만 안정된 생활을 하지않으려면 집을 짓고 한평생을 안정된 생활을 하지않으려면 첩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물론 왕영하는 첩이 아니지만 그들은 진짜 안정되지 못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먼저번에 말한 “막다른 곳에서도 길이 열린다”는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기9종”을 사보았기에 욱달부의 랑만적인 사랑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금후의 욱달부의 생활에 구경 어떤 영향을 끼쳤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창작에는 또 어떤 변화가 생겼겠습니까? 다음번에 계속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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