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달부전기—혼인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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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1-11-18 13:16| 조회 :4,958| 댓글 :0본문
욱달부전기—혼인비극
전번 집에서 우리는 욱달부가 왕영하를 사랑하다가 끝내 성공하여 자기의 “일기9종”을 출판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기9종”의 주선은 왕영하를 사랑하는것입니다. 1928년에 그는 끝내 왕영하와 결혼을 했습니다. 왕영하는 처음에는 아주 신중한 태도였습니다. 욱달부는 원래의 안해를 멀리 떠나 유럽에 가서 결혼식을 치르자고 했습니다. 모든것이 다 뜻대로 된후 왕영하가 말했습니다.
첫째, 유럽에 가지말고 그 돈을 남겼다가 집을 사고 둘째, 시골에 있는 안해와 리혼하지 말고 다시 가지 않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돈은 좀씩 부쳐주라고 했습니다. 결혼한후 그들은 혁덕로 가오리에서 생활했는데 혁덕로란 지금의 상덕로이고 가오리란 상덕로에서 연안로로 조금 더 나가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듣건대 그곳은 주위가 전원처럼 으늑한 기분이였으며 능히 정안사의 묘를 볼수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정안공원입니다.
지리적 위치로 보면 욱달부네가 살던 가오리는 장애령이 쓴 상덕별장과 몇백메터 사이에 있었는데 모두 이 멀지않은 거리에서 살았던것 같습니다 .왕영하의 회억에 의하면 그 집은 8원씩 주기로 하고 세를 맡았는데 전기도 없었답니다. 저는 처음으로 그들의 작품을 볼때 욱달부와 왕영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였습니다. 그처럼 저명한 문인들의 생활은 긍정코 아주 랑만적이리라고 생각했던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기도 없는 곳에서 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욱달부는 당초에 “불나방을 묻던 밤”이라는 문장을 썼는데 등불을 켜자 불나방이 날아들었다고 했습니다. 왕영하는 10년사이에 아이 넷이나 낳아키우느라고 아주 바빴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19살부터 30살까지 왕영하는 욱달부 옆에서 가정주부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중요한 문화장소에도 다녀야했고 집에 와서 밥도 지어야했습니다.
왕영하의 회억에 의하면 그때 왕영하는 밥을 지을줄 몰랐다고 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다 알고있지만 남자의 마음속으로 통하는 길은 꼭 위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해가 밥을 지을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욱달부가 배워주겠다고 했습니다. 왕영하는 당신은 밥 지을줄 아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욱달부는 지을줄은 모르지만 배워줄줄은 안다고 했습니다. 함께 상해의 음식점을 돌면서 먼저 먹어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는것이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다 팔아먹었어도 배워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랑만파문인의 생활이였습니다.
이로부터 볼수있는바 욱달부의 생활은 최초의 퇴페하고 막막하고 갑갑하고 울민하던데로부터 온화하고 향기로운 온난한 가정으로 된것이였습니다. 욱달부의 중요한 작품, 특히 소설은 모두 1927년 전에 쓴것이고 1927년 후에는 창작이 점차 적어지고 책출판이 많아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작이 적어지고 출판이 많아졌다는것은 이전의 작품밖에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전집을 펴낸 사람인데 어찌보면 좀 우숩기도 한 일입니다. 이제 30살을 먹고 전집이라는게 무슨 말입니까?그의 책 제목은 아주 퇴페적입니다. “한회집”, “페추집”, “기령집”, “참회집”…모두 다 침침한 제목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머리말에다 똑똑히 쓰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전집을 내게 된것은 나의 친구 왕영하의 덕분이고 나의 생명은 모두 그녀의 것입니다.
욱달부는 초기에 많은 작품을 써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왕영하와 결혼한후부터 그의 원고료가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부양에 쳐들어왔을때 욱달부의 어머니는 굶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던 초가집은 일본군의 마구간이 되였고 많은 책들이 없어졌습니다.
욱달부는 무슨 동기로 항주에 갔겠습니까? 동기는 아주 간단했는데 상해의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것이였습니다. 200원씩 받는 원고료를 아무리 아껴써도 상해에서는 집값이 비싸서 집을 살수가 없었습니다. 욱달부는 항주의 구제원에서 땅을 얻어 저절로 집을 짓기로 했던것입니다. 항주에 오니 상해에 있을때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가 항주에 가자 절강성의 당정요인, 여기서 말하는 당이란 물론 국민당입니다. 요인들이 그를 상빈으로 모셔셔 지위가 아주 높아졌으며 사곳에서 그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땅을 내주고 은전 1천7백원을 주어 집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집은 어떤 집이겠습니까?이건 일본사람의 전기에 기록돼있는것인데 새집은 대단히 호화로왔답니다. 두겹철문사이로 넓은 아스팔트를 깔았고 그 아스팔트길로는 하이야가 나다닐수 있었답니다. 세칸짜리 남향집을 지었는데 중간방은 객실이고 동서량쪽방이 침실이였습니다. 세칸짜리 집 뒤에는 또 객실, 주방을 따로 짓고 가구를 몽땅 새것으로 갖추어놓았습니다. 동북각에다 또 세칸짜리 집을 지었는데 욱달부의 사업실이였습니다. 그외에 또 아동유희실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 모든것은 다 욱달부의 구상대로 지은 것이였는데 다만 한가지 고층루각을 짓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자그마한 고층루각을 짓고 먼곳을 둘러보려고 했는데 그 고층루각은 짓지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기본상 설계대로 된 셈이였습니다. 이런 집을 짓는데 돈을 얼마나 썼겠습니까?1만 6천원을 썼답니다. 10년전에 그와 왕영하가 상해에서 결혼하고 들었던 집세가 8원이였고 지금은 적어도 4천원은 주어야 세집을 맡을수 있을것입니다. 그렇다면 8원과 4천원은 적어도 500배의 차이가 납니다. 500배로 계산한다면 이 만여원짜리 집은 얼마가 되겠습니까? 몇백만, 몇천만원짜리 집이 아닙니까?
첫째, 왕영하에게 탄복하지않으면 안됩니다. 그는 가정살림은 물샐틈없이 잘 꾸려나갈뿐만아니라 욱달부를 도와 문장을 정리하고 반복적으로 출판하게 했으며 출판비가 나와도 욱달부가 술을 마시지못하게 하고 그의 생활을 조리있게 조절하여 그처럼 많은 돈을 모으게 된것입니다. 집을 지은 만여원 돈이 대부분 욱달부의 원고료였지만 몇천원돈이 모자랐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모자라는 돈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욱달부에게 “당면”이라고 하는 성이 정씨인 한 녀학생이 있었는데 그의 집에는 돈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면”은 열정적인 욱달부의 숭배자였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모자라는 돈은 그 학생이 보태준것이였습니다. 저도 후에 “당면”이 돈을 냈다는 책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집을 다 지은후 그 집에서 얼마나 살았겠습니까? 두달을 살았답니다. 무엇때문이였겠습니까? 돈이 없고 빚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욱달부는 두달만에 복건에 가서 한달에 300대양을 받는 벼슬을 했는데 구체 직무는 복건성정부참의였습니다. 당시 복건성정부 주석 진이는 욱달부의 친구였습니다. 초가집살이를 하던 그가 그처럼 많은 돈을 들여 그처럼 리상적인 집을 지었는데 욱달부의 말에 의하면 책만해도 6.7천책이 있다고 했습니다. 철문과 꽃나무는 항주시 시장이 준것이고 다른 많은 물건들은 고급관원들이 준것이였습니다. 이처럼 궁궐같은 집에서 살게되고 항주시장과 관원들이 례물까지 받게된 욱달부가 인제는 10년전에 타락해서 거리를 헤매이며 미친사람처럼 마구 웃어대던 욱달부와 얼마나 멀어졌습니까?
그런데 한가지만은 변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울민이였습니다. 빚을 지고 복건으로 오게되자 울민이 생기기 시작한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부딪칠 울민과 비해보면 이런 울민은 울민도 아니였습니다,7.7사변과 8.13사변후 상해에서 싸움이 일어나자 왕영하는 어머니와 아이들을 데리고 항주로부터 부양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년말에는 절강려수까지 쫓겨갔는데 욱달부의 어머니는 부양을 떠나기 싫어서 따라가지 않고 있다가 일본놈들이 부양에 쳐들어온후 굶어서 죽었고 초가집은 일본군들의 마구간이 되였으며 그 많은 책은 몽땅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집이 불타버렸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집이 일본군 양마장이 됐다고 했습니다. 욱달부로 말하면 어머니는 고향에서 굶어서 돌아가고 힘겹게 지은 집은 두달밖에 못살고 일본군 양마장으로 돼버린것입니다. 그리고 친형님은 한간들에게 살해되였습니다.
1938년 3월에 그들은 무한으로 갔는데 늦게 가서 곽말약이 그에게 남겨놓았던 적대선전처 처장자리에 이미 다른 사람을 배치해넣었습니다. 곽말약은 난감하게 되여 그에게 제3청 설계위원이라는 자리를 배치해주었습니다. 모두들 알고있지만 조사원이라는것은 그저 허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욱달부는 아주 참답게 그일을 했습니다. 그후 몇달동안은 대아장등 여러곳을 다니면서 선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와 왕영하와의 관계는 빙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선 왕영하가 각방을 요구하여 이튿날부터 허소태와 함께 나가서 밤새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938년 2월에 욱달부는 곽말약의 부름을 받고 복주에서 무한으로 가던 걸음에 려수에 들려서 집사람들을 데리고 가려했습니다. 그때 욱달부는 왕영하가 절강성의 고급관원 허소태와 관계가 있다는것을 느꼈습니다. 그 증거로 첫째는 왕영하가 자기와 동침하기를 꺼리는것이였습니다. 이튿날에는 허소태와 같이 나가서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왕영하가 무엇때문에 그를 따라 갔겠습니까?욱달부의 말에 의하면 허소태가 그녀와 결혼을 하려하지 않았기에 따라왔다는것입니다. 그리고 허소태가 왕영하에게 홍콩돈 47만원이 들어있는 저금통장을 보였다는것이였습니다.저는 왕영하가 당시 정황을 쓴 글을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왕영하는 욱달부가 자기보다 더구나 고민하고 있다는것을 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성질이 급해서 겉으로는 나를 원망하고 나를 버리겠다고 했지만 내심적으로는 나를 가지못하게 붙잡아두려고 했습니다. 그는 언어나 태도로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이 변하지않았다는것을 말해주었으면 해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않고 더구나 랭담하고 더구나 소극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환상이 이미 현실로 되였다는것을 느끼고 엄중한 타격을 받았으며 스스로 빠져나올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더군다나 희곡성이 있습니다. 1938년 7월5일에 왕영하는 탈가를 했습니다. 탈가를 했다는것은 그가 무한의 집에서 떠나갔다는 말입니다. 이튿날 욱달부는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왕영하녀사 감. 란세에 남녀가 합하고 갈라지는것은 원래 정상적인 일인데 그대와 모 군과의 관계 및 가져간 옷과 장신구의 비용과 증서 등은 문제가 아니고 애들과 어머니가 몹시 그리고있으니 주소라도 알려주기를 간청합니다. 당신이 다른 남자와 좋아해도 좋고 집에 있던 장신구를 가져가도 좋은데 어머니와 아이들이 그리워하고 있으니 주소라도 알려달라는 광고였습니다.
그러니 왕영하인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친우들이 나서서 동원을 하여 왕영하는 며칠후에 돌아와서 다시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다시 좋아진후 한가지 협의서를 만들었는데 여기에 재미나는 몇가지 문건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 두사람이 싸인한 협의서입니다. 달부나 영하나 이전에 모두 결함이 있어서 때때로 충돌이 생기고 가정생활을 지옥처럼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올라 갈라지기까지 하였는데 이번에는 친구들의 중재로 다시 만났기에 둘은 서로 반성을 하고 이전에 부부간에 화목하지못하던 원인을 다시는 꺼내지않으며 둘은 각기 본분을 지키면서 미만한 생활을 회복한다는것이였습니다.
이후에는 오해가 있더라도 서로 량해를 하고 흉금을 털어놓고 말하며 말로만하면 증거가 없기에 협의서를 쓰고 증명인도 찾는다는것이였습니다. 이전에 일부 부부가 다툼질을 한후 협의서를 쓰는것을 보지못했습니까? 그런데 그 협의서를 공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공개하면 뭐가 됩니까?다른 하나는 욱달부의 사과서입니다. 그 사과서는 기실 왕영하의 것이였습니다. 사과서에는 이렇게 쓰고있습니다.
달부는 이전에 정신이 잘못되여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안해 영하녀사는 핍박에 못이겨 집에서 뛰쳐나갔다. 그런후 욱달부는 사람찾는 광고를 내면서 가군과의 관계와 장신구등 사실을 잘못 말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고 또 친구들의 권고를 들어보니 확실히 잘못된 생각이였기에 특히 신문에 성명을 내고 사과한다. 욱달부 씀.
독자거나 문학애호가거나 기타 모르는 사람의 태도로 보아도 욱달부는 신경병환자 같아보일겁니다. 안해가 달아났는데 남을 욕해놓고는 이틀도 못지나 자기가 정신이 잘못됐다고 말한것입니다.
두사람은 협의리혼을 한후 왕영하는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욱달부는 45살이였고 왕영하는 33살이였습니다. 왕영하가 방금 돌아온 이튿날에 일본군의 대포도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무한에서 나와 상덕에 온후 다시 장사로 갔습니다. 욱달부는 그때로부터 가정이나 녀자나 모든 일에 대해서 풀이 죽어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나중에 그는 중국에 남아있기마저 싫어졌습니다. 그는 싱가포르로 가려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한 근거는 없이 하는 말이지만 욱달부에게는 왕영하외에도 많은 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사랑하는 녀자가 바람을 피우고 외도를 하는 일이 있을때 왜 좀 너그럽게 량해를 해주지못하는가 하는것입니다. 기어코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어야 직성이 풀리는것입니까?
“타락”에서 나오는 최초의 사랑선언이 곧 사랑이 최고라는것입니다. 따라서 두번째 원인은 국민당이 자기를 업신본다는것입니다. 오늘날 어느 한 작가의 안해가 외도를 했다고 합시다. 그건 쉽게 리해할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외도하는 남자가 정부의 관리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세번째 원인이 있는데 그는 나라의 고난과 가정의 원한을 한덩어리로 만들었다는것입니다. 욱달부는 싱가포르로 가기로 결정한후 왕영하에게 알렸습니다. 왕영하가 오지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왕영하가 온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영하와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싱가포르로 갔습니다.
싱가포르에 가서 두사람이 함께 생활할때 욱달부는 1939년3월5일에 자기가 한시기 동안에 쓴 20여수 이 시를 홍콩 “ 대풍순간”에 실었습니다. 그는 시에서 왕영하가 어떻게 자기를 배반했고 어떻게 다른 남자와 관계를 발생했으며 자기는 또 어떻게 실신을 했댔다는것까지 다 밝혀놓았습니다. 물론 모두가 일방적인 말이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알았다는것까지 다 써넣었습니다. 그러나 왕영하는 전혀 모르고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왕영하가 그 잡지를 봤을때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왕영하는 그때를 회억하면서 “회가시기”를 보고 또 보면서 어쩌면 이럴수가 있는가면서 믿지를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미 화해를 다 하고 다시 함께 살고있는데 어쩌면 이렇게 할수가 있는가고 믿어지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욱달부는 그저 잡지에 시를 내는것으로 그친것이 아니라 홍콩의 그 잡지사에 말해서 그 잡지를 장개석, 소력자, 우우임, 류아자 등 국민당 상층인물들에게 부쳐주라고했습니다.
욱달부는 자기가 쓴 시가 괜찮은것 같아서 류아자 등의 칭찬을 받고싶었던 것이 첫번째 동기였습니다. 두번째는 국민당 하층 관원이 이런 일을 했는데 장개석도 좀 보라는 뜻이였습니다. 관원들이 얼마나 부패해졌으면 나의 안해까지 끼고 놀아대는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왕영하는 접수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마안가서 리혼을 제기하고 둘은 협의리혼을 한후 왕영하는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때 욱달부는 45살이였고 왕영하는 33살이였습니다. 왕영하는 중경에 온후 종현도라고하는 상인과 결혼을 한후 몇십년간 평화스러운 혼인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결혼을 할때 당시의 국민당기록편촬영소를 청해다가 결혼식기록편을 찍게 했습니다. 그때 왕영하는 33살이였는데 명인이였고 미인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식을 굉장하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심리적으로 복수를 하려고 한것입니다. 그녀는 욱달부와 결혼할때 명의가 바르지 않아서 말이 통하지 않던 사실이 계속 념려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잃어버린 욱달부의 편지를 제가 이번에 이 이야기를 준비할때 찾아냈는데 “욱달부간---왕영하에게”입니다. 욱달부는 그때 “일기9종”에서 왕영하에게 정에 넘치는 련애편지를 썼는데 저는 다시 읽어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읽으면서 갑자기 책의 첫페지에 이런 글이 있는것을 발견했습니다. “자동꼬마에게, 왕영하” 저는 이 일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자동꼬마라는것마저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에 감동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왕영하가 간후 욱달부는 싱가포르에서 시 한수를 발표했는데 그 마지막 말이 이렇습니다. “등불을 마주앉아 우스개를 하는데 엄마는 진짜 언제나 오려나” 그말인즉 그의 옆에 세아이가 있는데 엄마가 언제면 오느냐고 자꾸 묻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황을 왕영하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지만 그때로부터 욱달부는 한걸음 한걸음 이 종목의 마지막 집인 달부의 죽음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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