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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달부전기--달부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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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1-11-18 13:22| 조회 :3,76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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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욱달부전기--달부의 죽음


전기욱달부는 오늘이 마지막 집 “달부의 죽음”입니다. 1942년에 일본침략군이 싱가포르를 진공하자 사람들은 도망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욱달부는 호유지, 왕임숙 등 28명과 함께 싱가포르를 떠나 네덜란드의 작은 섬으로부터 수마트라섬에 도착하여 자그마한 바예라는 곳에서 일을 봤습니다.

그때 욱달부는 변명을 하고있었습니다. 조렴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수염을 길러서 사람들은 그를 조수염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동복을 입고 바예로 근무하러 가는 길에 한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뻐스가 방금 떠나가자 일본병사들이 뻐스를 막아선것입니다. 일본병사들이 뻐스에 올라와서 뭐라고 떠들어댔지만 뻐스안의 사람들은 긴장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자기를 붙잡으러 온줄로만 생각했는데 기실은 그런것이 아니고 길을 물은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일본말을 누구도 알아들을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긴요한 관두에 욱달부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일본병사들이 길을 묻는다는것을 알고 대답했습니다. 욱달부의 일어는 아주 전형적인 동경말투였습니다. 일본병사들은 대부분이 무사거나 거친 사람들이 돼서 자기네 일본말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들은 수염을 기른 중국 로동자가 자기네 일본말을 그처럼 멋있게 하자 일본군관은 욱달부에게 경례를 붙였습니다. 그리하여 뻐스안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된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일이 나쁜일로 될줄을 몰랐습니다. 욱달부가 바예로 오자 많은 화교들이 욱달부를 일본간첩이라고 했습니다. 일본군관마저 경례를 하는데 간첩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그래서 욱달부는 바예에서 일을 볼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똥을 피하듯 피해다녔습니다. 물론 후에는 해석을 해서 욱달부가 간첩인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후 조수염은 그곳에서 술공장을 차리고 당지에서 마누라를 얻고 괜찮게 살았습니다.  마지막 몇해는 욱달부의 술공장이 돈도 괜찮게 벌었는데 중간에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1942년 6월부터 1943년 2월까지 대략 7.8개월간 일본헌병대에서 욱달부더러 번역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욱달부가 누군지 몰랐답니다. 이 대목이 아주 중요한데 우리의 명칭이 변하는것이 아주 관건입니다. 만약 그들이 욱달부를 찾는다면 그건 다른 일입니다. 그들은 와서 욱달부를 찾는것이 아니라 조렴이라고 하는 상인을 찾았습니다. 여기에 일본말을 잘 하는 조렴이라는 상인이 있다는데 번역을 좀 해달라고 했습니다.

조렴은 장사를 해야되기 때문에 번역을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못하겠다고 하면 군법으로 처리하는데 헌병대와 무슨 장난질인가고 했습니다. 당시의 선택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안하면 죽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죽어도 다른 사람이나 욱달부가 죽어야하는것이 아니라 꼭 조렴이 죽어야 한다는것입니다. 죽기 싫으면 번역을 하라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조렴은 번역을 하기로 하고 몇가지 요구를 제기했습니다. 그 조건인즉 번역은 해주되 돈을 받지않는다는것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돈을 주고 쓰는 고용자가 되지않고 자기가 할일이 있으면 번역을 하지 않는다는것이였습니다. 일본사람들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돈을 받지않으면 자기네는 더구나 좋다는 뜻이였습니다.

몇달동안의 헌병대 번역생활에서 번역을 가장 많이 한것은 호유지였습니다. 욱달부는 번역하는 기간에 자기 마음대로 번역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의 일은 모두 좋게 번역하여 한사람도 총살당하지 않았습니다. 헌병대는 욱달부가 번역하는 기간에 한사람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두번째로 누가 만약 일본놈과 간통하여 첩자가 되려고 하면 욱달부는 그런 사람을 죽여주었습니다. 례를 들어 누가 일본사람에게 고자질을 하면 욱달부는 일부러 일본사람들에게 불리하게 번역을 해서 오히려 일본놈들에게 혼줄이 나게 만들었습니다.

더 중요한것은 세번째인데 일본놈들이 인도네시아공산당의 명단을 들고 와서 번역해달라고 하면 욱달부는 명단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이 째째하기를…돈 몇잎 꿔간것까지 이렇게 명단에 적어놓고 산단 말입니다.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일본놈들은 그 말을 듣고 정말 째째한 사람들이라면서 그 공산당명단을 찢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당지의 지하당을 보호했는데 호유지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이 모두 이런 회억을 했습니다.

비교적 믿음직한 회억은 왕임숙이 한 말인데 “바늘방석에 앉은것 같다”는 말이 당시 헌병대에서의 욱달부의 생활에 가장 알맞춤하다는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차 죽어버리는 사형은 접수할수 있지만 죽이지도 않고 끝이없이 가해오는 혹독한 고문은 접수하기 힘든것처럼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하는 것은 한 전사로놓고말하면 가장 어려운 시달림이고 가장 잔혹한 고험입니다.

어떻게 고험하는지 아십니까?욱달부는 한평생 애주가였지만 그때는 술 한방울도 입에 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는 왕임숙에게 가장 두려운것이 잠꼬대라고 했습니다. 만약 자다가 일본말로 자기를 폭로하기만 하면 끝이 나고 마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방금전에도 말했지만 욱달부의 복잡한 성격을 보면 이것은 한낱 진정한 고험이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이 이름마저 고치고 적대국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한다는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였겠습니까?

그러나 욱달부는 그런 일을 하면서 지하조직을 보호하고 인도네시아공산당을 보호한것입니다. 조렴은 1943년 9월15일에 진련유라고 하는 광동녀자와 결혼했는데 이는 세번째 결혼이였습니다. 그녀는 20살이였는데 결혼할때 욱달부는 그녀의 이름을 하려유라고 고쳤습니다. 하려유란 그녀가 곱게 생기지 않았다는 뜻이랍니다. 욱달부의 첫번째 안해도 인물이 그닥지 않았습니다.두번째 안해 왕영하는 대미인이여서 서로 죽자살자하고 지냈습니다. 지금은 피난을 와서 마흔살에 스무살난 녀자를 다시 안해로 맞아들였는데 전혀 곱지않았습니다. 그는 그녀를 “파타”라고 했는데  파타란 바보라는 뜻이였습니다.

그녀는 아주 로실하고 철이 없었습니다. 그녀도 후에 불행이 생겼는데 무엇때문이였겠습니까?욱달부는 그녀가 자기의 신분을 알지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결혼한것은 욱달부가 아니고 조렴이였으며 조렴은 일본사람과 화교들과 거래를 하면서 당지의 녀자와 아이 둘이나 낳았습니다. 이 두 아이를 후에 저는 다 만나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욱달부는 어디에서 뭘하고 있었겠습니까?

욱달부는 그의 지하동사자인 호유지 등 사람들과 거래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시도 썼는데 시들이 아주 까다롭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심정을 모두 시에 기탁하고 살면서 발견되지 않기위해 힘썼으나 결국은 발견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신분이 밝혀진데 대해 두가지 설법이 있는데 하나는 당지에 홍근배라는 사람이 욱달부에게 녀자를 소개해달라고 해서 욱달부가 대답한 적이 있다는 설법입니다. 후에 알고보니 욱달부가 소개하려는 사람인즉 친구의 친척이 되는 사람이였기에 소개하지 않기로 하고 홍근배의 청구를 사절했습니다.

이는 완전한 개인적인 관계였는데 홍근배는 일본사람을 찾아가서 조렴이라는 수염쟁이 주인은 싱가포르 문화계의 항일협회 주석이고 대륙의 중요한 작가라고 물어넣었습니다. 그는 중화학교의 전임교장과 함께 가서 고발했습니다. 이 전임교장도 욱달부에게 도움을 청한 일이 있었는데 욱달부가 도와주지 않았다고하여 앙심을 품고 함께 가서 고발한것입니다.

그외에 다른 한가지 설법이 있습니다. 포사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욱달부가 실종되기 전까지 함께 밥을 먹었다는 사람으로서 당시 당지의 중요한 사람이였습니다. 포사정의 회억에 의하면 어느 혼례장소에서 욱달부가 일어로 시를 쓴적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때 그가 쓴 시를 일본헌병대에서 발견했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일어를 이렇게 잘 아는가 의심하여 동경에 데려다 심사를 했다는것입니다.

일본동경방면에서 조사를 한후 헌병대에서는 이런 일본시를 쓸수있는 사람이 네사람밖에 없는데 주작인, 주수인, 욱달부, 곽말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수인-로신은 이미 죽었고 주작인은 이미 한간이 되였으며 곽말약은 장개석 밑에서 벼슬을 하고 나머지는 욱달부밖에 있을수 없으므로 일본시를 쓴 사람이 바로 욱달부라고 판정했습니다.

후에 알아본데 의하면 이 두가지 근거가 다 정확하지 못합니다. 일본사람들은 욱달부를 찾아 이야기 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이름이 혁혁한 욱달부선생이시였군요. 당신의 이름은 우리 일본말 자전에서도 찾아볼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욱달부는 가지않았습니다. 또한 갈수도 없었습니다. 인차 호유지 등 사람들을 다른데로 전이시켜야 했습니다.

그 다음 일은 다 알겠지만 8월 15일에 일본이 투항했는데 투항하기전에 일본사람들은 지하운동을 몇번 청리했습니다. 8월29일 밤에 욱달부는 포사정 등 당지의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농장을 꾸릴것인가하는 일을 토론하고 있는데 한 인도네시아 청년이 들어와서 할말이 있다면서 욱달부를 나오라고 했습니다. 욱달부는 인차 오겠다고 말하고는 잠옷을 입고 게다를 끌고 나갔답니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그들 둘은 커피점으로 들어가서 한참 다투다가 다시 골목길로 나왔다고 합니다. 골목길에는 자동차 한대가 서있었고 차에는 일본사람 두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밤에 욱달부는 실종되였습니다. 8월30일에 욱달부의 막내딸이 태여났습니다. 안해가 아이를 낳는 전날에 실종된것입니다.

 1946년에 호유지는 중화전국문예협회에 보고를 써서 욱달부의 정황을 말했습니다. 일본사람들의 정황은 그가 몰랐습니다. 호유지는 당시의 점령군인 쏘련, 영국, 미국 등 련군을 찾아다니면서 욱달부의 소식을 물어보았습니다. 련군당국에서는 자기들이 일본전범을 심문했는데 일본군은 1945년9월17일에 몇사람을 총살했다고 말했다는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욱달부와 몇몇 유럽사람들이 섞여있었다는것입니다.

호유지는 자기의 보고에 이런 정황을 다 써넣었습니다. 호유지가 그 보고를 써보낸후 그 보고는 아주 권위성이 있는 보고로 되였습니다. 그가 만년에 욱달부와 함께 있었기때문이였습니다. 그래서 1952년에 부양현정부에서는 욱달부를 렬사로 추인했고 중국에서는 줄곧 그대로 인정해왔습니다. 욱달부는 일본헌병에게 살해되였다는것입니다.

후에 저는 일본에 갔다가 스즈끼라고 하는 교수를 만났는데 일본사람들은 욱달부의 생평재료를 할때 그의 죽음을 두고 중국측에서 내린 결론이 아주 경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왜서 그렇게 간단하게 우리 일본헌병이 죽였다고 말할수 있는가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재료를 찾아봤는데 찾아본 정황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1.조사결과심판에 참여한 변호사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2.     지도에 서술한 지명이 없습니다.
3.     실종된지 며칠에 무엇이 발생했습니까?결과 원래 심판에 참여했던 일본변호사들이 모두 그런 심판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둘째, 그런 곳을 근본상에서 찾을수 없다는것이였습니다.
세째, 만약 그렇다면 8월29일에 실종되여 9월17일에 죽었는데 그럼 20일이나 되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하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종돼서 죽을때까지 20일이라는 시간이 있는데 이처럼 작은 곳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모를수 있겠습니까?

스즈끼는 당사자 백여사람을 찾아 물어보았는데 이 20일동안에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것을 아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호유지의 설법은 도리가 없는것이기에 증실할수 없다고 했습니다.당시 저는 스즈끼의 말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욱달부가 일본사람들 손에 죽지않았으면 어떻게 죽었겠습니까?

후에 그는 많은 당지사람들을 취재했는데 어떤 사람은 일봄사람이 죽였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당지 사람이 죽였다고 했습니다. 스즈끼는 아주 상세하게 조사연구한 후 네가지 가능성을 내놓았습니다.

첫째, 욱달부는 인도네시아사람들이 붙잡아다가 살해했다는것입니다. 이는 아주 간단한바 욱달부가 일본사람들을 위해 일했기에 인도네시아유격대가 죽였다는것입니다.
둘째, 화교들이 비밀리에 그를 조국으로 빼돌렸다는것입니다. 세째는 자기절로 은거를 했다는것입니다.

네째는 일본헌병들이 살해했다는것입니다.

저는 상해에서 지위가 있고 영향력이 있는 현대문학을 연구하는 선배들과 토론해보았는데 그들도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에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죽이지 않았으면 일본사람들이 죽였다는것입니다.

이건 보통일이 아닙니다. 만약 인도네시아 유격대에게 죽었다면 그는 일본놈을 위해 일해준것이 되기때문에 적어도 오점이 묻게 될것이고 만약 일본놈들에게 살해당했다면 그는 렬사로 되는것입니다.

스즈끼는 인도네시아사람들이 죽였다는 쪽으로 더 치우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그는 책 한권을 찾아냈는데 일본헌병대의 책 “유적원호회회원명단”이였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대전때에 일본헌병이 죽으면 그들의 가속에 련의회가 있는데 명단책을 만든것입니다. 그 명단에서 그는Y라는 헌병을 찾아냈는데Y의 대호는 몽땅 그의 것이였습니다.

아직 그를 존중해야 하기에 그의 진명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Y라는 헌병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누나가 남동생의 상급을 찾아갔습니다. 상급은D였습니다. 그는 상급을 찾아가서 내동생이 어떻게 죽었는가고 물었습니다.D는 동생이 왜서 죽었다는것은 알려주지 않고 동생에게 중국사람을 죽이라고시킨 일은 있다고 말했습니다. 스지끼는 그 일에 흥취를 가지고 많은 힘을 들여서 끝내 그녀를 찾아냈습니다. 그녀는 쪽지에 글을 써주었는데Y의 이름을 쓰고 “지나사람조”라고 써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동생이 지나사람인 조씨를 죽였는데D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스즈끼는 헌병D를 찾아갔는데 그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 그일은 1985년9월까지 밀려내려왔습니다. 

1985년 9월에 욱달부를 기념하는 회의를 해야했기에 그는 또 D를 찾아갔습니다. 만약 그일을 승인하면 중일전쟁의 상처를 완화하는데에 좋은 점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알은체도 하지않았습니다. 나중에 스즈끼교수는 그 종이쪽지를 꺼내 보였습니다. 그때 그는 70여살이 되였지만 정신력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는 원래 검도5단이였답니다. 이 헌병대반장은 그 종이쪽지를 보더니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얼굴이 창백해 났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끝내 승인하고 말았습니다.

원래는 그가Y와 다른 한 병사에게 명령하여 욱달부를 죽이게 한것이였습니다. 원인은 아주 간단했는데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였답니다. 당시의 헌병들 그리고 그와 상급은 모두 전쟁범에 속했기에 죽지않으면 포복자살을 해야 했습니다. 안그러면 련군에게 잡혀 총살을 당하거나 군사법정의 심판을 받아야했습니다. 그는 이름을 바꾸고 일본으로 달아나서 용케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이미 욱달부와 함께 있은지 몇년 잘 되였습니다. 그는 욱달부가 믿는 사람이였고 욱달부한테는 태도가 아주 좋은 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욱달부는 문인이였기에 지금까지 자기가 한 일을 일단 말하기만 하면 자기가 아무리 이름을 바꾸어도 숨길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욱달부를 죽이려고 한것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총으로 죽인것이 아니라 목을 조여 죽인것입니다.

호유지의 회의때의 연설원고는 미처 고치지 못했는데 후에 사해에서는 제대로 고쳐놓았습니다. 욱달부는 1945년 8월29일에 죽었습니다 저는 마지막에 어떤 말로 욱달부의 일생을 개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동시대 사람이 한 말 두마디로 결속어를 대신하겠습니다. 호유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인이였고 리상주의자였던 욱달부는 “5. 4”거장중의 한사람으로서 영원히 “5. 4”에 충실했고 “5. 4”를 배반하지 않았으며 조수염이 욱달부를 위장한것과 마찬가지로 표면상의 생활태도는 술을 좋아하고 녀자를 좋아하고  색정시를 좋아했지만 그것은 시인의 위장이였고 적을 미혹시키고 박해자를 피하기 위한것이였습니다. 오직 감정이 없거나 종래로 욱달부와 직접 접촉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욱달부의 표면현상을 놓고 평가를 하는데 만약 욱달부와 접촉해봤거나 욱달부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욱달부가 생활을 얼마나 엄숙하게 대했으며 인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수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마디 말은 곽말약이 한 말입니다. 달부의 어머니는 부춘을 잃은후 도망을 가지않고 고향에서 굶어죽었습니다. 달부의 친형 울화, 만타선생, 명화가 울봉의 아버지는 상해에서 위조직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왕영하는 리혼한후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작은 두 아들은 듣자니 고향에 있고 큰아들 울비는 아버지친구의 도움을 받아 상해로 날아갔습니다. 그때는 정보가 빠르지 못한때여서 어느때 어디에서 피해를 받을지 알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욱달부의 가속은 그야말로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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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세계유산 (하) 인기글 중국의 세계유산 (하)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에는 중국고대문명과 신앙의 상징인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태산입니다. 중국에서 고대 제왕들은 등극초기 태평성세를 바라고 태산에 와서 천지에 제를 지내고 소망을 빌었습니다. 이렇게 태산에 올라 축제를 올린 제왕만이 백성을 통치할수 있는 권력을 행사하게 했습니다. 중국인은 등산과 물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마음속의 희노애락과 자연의 산수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중국산수문화의 풍부한 내연을 만들었습니다. 태산의 돌을 다듬어 만든 석각은 근 천여개에…(2011-05-18 09:08:28)
중국의 세계유산 (상) 인기글 중국의 세계유산 (상)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은 만리장성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시황은 사분오열된 전국시대를 결속짓고 기원전221 년에 중국력사에서의 제일 첫번째 봉건제국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는 원래의 북방장성을 이음과 동시에 장성을 보수하고 확건시켰습니다. 이로부터 장성이 형성되였습니다. 그 이후 력대의 조대로 내려오면서 2000여년간 끊임없이 보수와 수건을 하여 길이가 5천만메터에 달하게 되였습니다. 진시황이 건립한 제국이 얼마나 흥성…(2011-05-17 09:46:06)
음력설의 진미---풍속 인기글 음력설의 진미---풍속 조 형 조형은 학자이며 연산출판사의 주필입니다. 주요하게 중국문화사 북경사와 희곡사 등 령역의 연구에 종사합니다. 주요저작으로는: 《로주만필》《수장쇄담》《구외담설》입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선 여러분들에게 늦게나마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정월 초이레입니다. 이전에 이런 한마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설을 기다리다가…(2011-03-14 10:08:48)
음력설의 진미 ---년화 인기글 음력설의 진미 ----년화 송 조 린 송조린은 중국국가박물관의 연구원이며 중국민족고고학의 일인자다. 저작으로는《중국원고문화》《중국전통명절》《녀아국친력기》등이 있음. 무엇을 년화(年画)라고 할가요 간단하게 말…(2011-03-11 15: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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