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가장 아름다운 고장(2)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1-11-23 08:26| 조회 :3,712| 댓글 :0본문
중국의 가장 아름다운 고장(2)
리전과 (《중국국가지리》잡지사 사장 겸 총편집 )
대자연은 얼마나 넓고 거대합니까? 만약 나보고 중국의 가장 아름다운 고장이 어디에 있는가고 묻는다면 저는 서장에 있다고 대답할것입니다. 서장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중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릅니다. 960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중국이 대체 얼마나 큰지 딱히 찍어 말하기 어렵지만 이 사진이 보여주는 신강의 드넓은 초원에 가보면, 초원주변의 모래사막과 사막우에 면면히 이어진 설산, 빙천으로 구성된 백색산정에 올라가보면 960평방킬로메터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게 될것입니다. 때문에 서장에 가보지 않으면 중국의 미를 알수 없고 신강에 가보지 않으면 중국의 크기를 알수 없습니다. 자연의 미는 그것의 장미와 대미에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연을 정복한다고 말하지만 과학적인 자연리념으로 말하면 자연은 정복할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연정복을 우리의 사기를 돋구는 웅장한 구호로 내세울수는 있어도 절대 행동지침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몇십년을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을 초월한다고 웨쳐대긴 했지만 정말 그것을 우리의 행동지침으로 삼을 때는 복잡하고 지어 인류가 수건하고 미봉할수 없는 거대한 자연보복을 당하게 될것입니다. 그러잖아도 이미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있습니다.
대자연의 앞에서 인류는 정복하려 하지 말고 많이는 자기도전을 해야 합니다. 너와 나의 극한에 도전하는것입니다. 올해에 내가 4500, 5000메터 높이를 톺아올랐다면 5500, 6000메터의 높이가 또 나를 기다리고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류이고 인류의 자연철학입니다. 모든것이 결국은 자연으로 돌아가기마련입니다. 대자연앞에서 우리 인류는 매우 보잘것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류는 절대 대자연의 진전을 개변할수가 없습니다. 자연의 폭풍, 자연의 흙사태를 인류가 일으킬수 있습니까? 지진을 다시 일어나게 할수 있습니까? 누구도 할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제실력, 기술수준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자연을 상대하여 정치의식형태분야의 풍기를 버리고 대자연철학으로 말한다면 존재가 곧 철학이고 존재가 곧 필연입니다. 자연계의 매개 요소의 존재가 모두 그것의 필요성과 합리성을 띠기때문입니다. 인류에게는 대자연의 매개 요소의 번영과 생식을 막을 능력도 없고 재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의 미를 감상할 때 우리는 존재가 곧 필연이라는 자연계의 법칙을 알고 인류는 대자연을 초월할수 없다는 리념을 가져야 합니다.
례를 들어 북극으로 갈 때 우리는 여러가지 방식을 취할수 있었습니다. 말라뮤트개가 끄는 썰매에 장비를 싣고 우리는 발에 스키를 동이고 아득한 북빙양을 한걸음한걸음 걸어갔습니다. 두세메터 두께의 얼음이 수시로 갈라졌다 합쳤다 하면서 부풀어오른 얼음우를 우리는 힘겹게 걸어갔습니다. 북빙양을 건너는건 인류의 꿈이였습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인류는 선후로 많은 영웅적아들딸들의 희생을 내며 마침내 78년만에 서북항도와 동북항도를 개통하여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하나로 이어놓았습니다. 이로써 인류는 강장 빠르고 가장 가까운 한갈래 로선을 찾고야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건너간 북빙양입니다. 웃사진을 보면 북빙양의 표면이 널판지처럼 평탄하고 하얀 얼음판이지만 아래사진은 이런 길도 인류는 건너야 했습니다. 인류는 하늘보다 높은 꿈과 격정이 있을 때면 어떻게든 자기를 보호하면서도 자연의 극한을 돌파할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인류가 자연을 초월한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연의 법칙을 리용하여 자연을 돌파하는 방법을 찾았을뿐입니다. 이 돌파의 방법을 증명할수 있는자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마치 상업경쟁에서처럼 여러갈래의 길에서 정확한 길, 정확한 팀, 정확한 시간을 선택하여 실천한자가 성공하듯이 탐험도 마찬가지 도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 남극의 극야인데 해양의 빙산과 빙천이 북빙양과 완전히 다릅니다. 북빙양은 4000메터가 넘는 심해분으로서 밑은 거대한 바다고 표면은 두세메터 두께의 얼음층으로 덮여있습니다. 이 얼음층은 바다흐름의 진동에 의해 언제든 갈라지고 부딪치고 맞붙을수 있습니다. 남극대륙은 이와 반대로 거대한 바다가 1400평방킬로메터의 대륙을 에워쌌는데 이 대륙이 4000여메터 두께의 얼음에 덮여있습니다. 이 얼음두께가 얼마나 무거운가 하면 남극의 1000여평방킬로메터의 대륙을 바다평면에서 륙칠십메터 아래로 짓누를수 있습니다. 하다면 날로 지구가 온난화되여가는 요즘 어느날 정말로 남극의 얼음이 붕괴되면 어떻게 될가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을것입니다. 수학적인 방법으로 계산하면 남극의 큰 얼음산이 붕괴되였을 때 지구의 바다표면이 67메터 상승하여 상해는 물론 북경, 천안문광장도 바다에 가라앉을것이나 자연계의 모든 법칙은 이렇게 수학자들이 말하는것처럼 1+1=2의 방식으로 가지 않습니다. 자연계는 다급적입니다. 마치 북경이나 상해에서는 례사로운 일로 생각하는 폭우가 신강이나 서장과 같은 물이 부족한 지구에 내렸을 때 비록 물이 부족하여 비가 내리기를 바라긴 했지만 그런 강한 비는 되려 그들에게 재난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계의 법칙입니다.
지금까지 자연의 미, 자연철학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하다면 지리의 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지리의 미에서 가장 중요한건 차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차이성이 우리의 발길을 끌어당깁니다. 우리가 상해에서 볼수 있는건 평원과 고층건물과 분경식의 도시건축이지만 빙천과 설산, 자연의 하류와 호수는 볼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경의 화분이 아니라 화원의 화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러 갑니다. 이것이 차이성입니다. 만약 상해나 북경, 광주 지어 서장의 미두이빙천, 림지 등 고장의 경치가 엇비슷한데도 우리가 이런 고장을 그냥 유람하러 다닌다면 그것은 단지 사업과 생존의 압력때문일것입니다. 기업책임, 사회책임 등 원인으로 사업의 수요에 의해 어쩔수없이 가야 하기때문입니다. 이런 원인이 아니라면 우리가 사업여가에 휴가를 리용하여 자기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면서 락을 즐기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런 차이성을 발견할수 있기때문입니다. 이런 차이성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혹은 우리의 인생경력에서 경험한적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찾아나서는겁니다. 위대한 탐험가들이 희생을 각오하고 남극점으로, 북극점으로 가서 우리 자손후대들을 위해 더욱 가깝고 효과적인 통로를 찾으려 한것도 그것을 우리가 모르고있었기때문입니다. 만약 이 모든것을 인류가 알고있었다면 왜 하필 그런 모험을 하겠습니까?
지리는 자연계법칙을 묘사하는 과학의 하나일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리의 미에서 가장 중요한건 차이성을 찾는것입니다. 이 고장과 저 고장의 다른 점, 상해와 북경의 다른 점을 찾는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상해에 가서 회의를 하고 상무를 보는 여가에 일부러 일부 골목과 거리를 돌아다니고 일부 지방에 묵기도 합니다. 만약 상해의 모든 지방이 북경과 똑같다면 내가 왜 사업이나 회의여가에 돈과 시간을 팔며 거리를 돌아다니겠습니까? 도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지리의 미는 차이성입니다. 이런 차이는 시간적이든 지역적이든 민족적이든 종족적이든 문화적이든 막론하고 차이로 하여 아름다움이 이루어집니다.
이 폭포를 보십시오. 여러분들도 암석의 가파로운 낭떠리지를 타고 쏟아지는 그런 물폭포는 보았을겁니다. 이것도 물폭포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분출되는지 잘 보십시오. 거대한 빙천속에서 분출됩니다. 얼음절벽의 높이가 100메터도 넘는데 빙천의 중부에서 대량의 물이 뿜어져나옵니다. 대자연의 이런 많은 승경을 두고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을 땐 반신반의하는 상상속에 묻혀있겠지만 실제로 그것을 보았을 땐 자연의 힘이 얼마나 신기한지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 빙천속에서 뿜어져나오는 얼음폭포의 높이는 60메터도 넘습니다. 그리고 폭포가 떨어지는 웅장한 소리로 보나 물량을 보나 황과수폭포에 뒤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황과수폭포를 보신분들이 있겠지만 이 빙천폭포의 앞에도 지표온도가 섭씨 93도에 달하는 온천이 있습니다. 폭포가 떨어져 지면에 물이 닿을 때면 모두 수증기로 변해 김이 무럭무럭 피여오릅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른바 빙화이중천이요 빙화욕생이란 이야기입니다.
자연계에는 이런 이야기가 많고도 많습니다. 례를 들면 조류는 모두 나무나 풀숲에서 사는줄만 알았지 어떤 새는 동굴에서 산다는걸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것도 박취처럼 바위굴이 아니고 깃털을 가진 날아다니는 새가 꼭 쥐굴을 보금자리로 합니다. 바로 서장의 청장고원에 가면 커커시리, 아르진, 창탕 등 곳곳에서 이런 새를 볼수 있습니다. 하다면 이런 진귀한 새가 왜 쥐굴에서 사는지 아십니까? 나무나 풀로 된 보금자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런 보금자리가 없기때문입니다. 겨울에 눈보라의 혹한을 피할수 있는 곳은 쥐굴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새에게 자기절로 굴을 파서 보금자리를 만들 능력이 있는것도 아닙니다. 쥐는 왜 자기의 굴에 들어오는 새를 받아들이는가 하면 공생관계를 발생하기때문입니다. 겨울이 되면 땅이 철판처럼 얼어붙어 아무리 날카로운 이발을 가진 쥐라도 나무뿌리를 파먹기 힘겹습니다. 그리하여 쥐는 좋은 날에 새가 멀리서 물어오는 마른풀이나 새의 배설물로 근근득식하면서 생명을 연장해가다보니 쥐와 새가 함께 살아가는 아주 기묘한 자연조합이 이루어진것입니다. 이것은 자연계에서 흔히 볼수 있는 현상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