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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녕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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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2-03-16 14:34| 조회 :2,60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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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진  녕  (하)


 [증도] 1971년 여름 양진녕은 프랑스행비행기를 타고 26년이나 리별했던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중미관계가 풀린후에 제일 처음으로 새중국을 방문하는 저명한 화교 학자였기에 북경에서 그는 주은래총리의 접견을 받았습니다. 그 해 8월4일에 그는 장성에 올라 력사성적인 기념을 남겼습니다. 손가락 한번 튕기는 사이에 벌써 몇십년이 지나갔습니다. 지금 양진녕선생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국토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있습니다. 그러나 반세기전으로 돌아가보면 당년에 양진녕이 조국으로 돌아오려 할때 크나큰 압력을 받았습니다.

635712752_dca50f60_5f11dbef-d6b5-46f8-8c[사회자] 1957년 양진녕이 노벨물리학상을 받기 몇달전에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12년동안 갈려져있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후 아버지와의 몇차례 상봉은 천륜지락이 가져다주는 커다란 만족외에 그는 부모들을 통해 중국의 많은 소식을 들을수 있었습니다.
[증도] 1971년에 선생님께서는 미국적 중국인학자로서 조국으로 돌아왔는데 학술계에서는 조국으로 돌아온 첫사람이였지요. 당시에 이런 선택을 하려면 용기와 담량이 있어야 하지 않았나요?

[양진녕] 1971년에 제가 중국으로 가겠다고 하자 많은 화교들과 비화교 벗들이 절대 가지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카피차가 쓰딸린한테 붙잡힌걸 모르는가 선생님도 이제 가게되면 그렇게 되지않겠는가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 신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중국의 작풍이 쓰딸린과 같지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무엇때문에 그런 신심이 있었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와의 접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그때의 생각은 완전히 옳았습니다.

저는 조국에 가면 중국의 지도자들과 내가 중국에서 살겠다고 말하면 중국이 나를 받아줄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지않았으면 중국은 저에게 이런 말을 하지않았을것입니다. 저의 추측은 완전히 정확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때 명성이 있는 화교과학가로서 첫번째로 중국에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증도] 선생님께서는 1945년에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셨는데 후에 가족사람들과 만날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진정으로 중국에 돌아오지 않았지요. 1971년에 처음 중국으로 오는 비행기에 앉았을때 그 심리상 감수는 어떠했나요?

[양진녕] 령혼을 촉동하는 그런 감수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가장 큰 감수라면 제가 본 중국이 1945년에 제가 중국을 떠날때의 중국과 완전히 달라졌다는것이였습니다.저는 중국의 큰 변화를 보면서 감정상으로부터 크나큰 진동을 받았습니다. 이런 진동은 지금에 봐도 응당 있어야할 진동이였습니다. 때문에 저는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미국에 간후 석계에 가서 강연을 했는데 강연실은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중국을 아주 희귀하게 생각하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기들이 잘 알고있는 양교수가 중국에 갔다와서 새중국에 대한 강연을 한다니깐 많은 사람들이 모여온것이였습니다.

강연을 들은후 어떤 사람들은 기록을 했는데 그런 기록을 하게 된것은 제가 한가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이야기를 했댔습니다. 나는 일주일간 북경호텔에 들어있었는데 내가 든 방은 매우 컸습니다. 그런데 벽에 한폭의 대련이 걸려있었는데 대련에는 “희생이 있었기에 그 뜻도 장하거니 일월을 휘여잡아 새세계를 바꿔오리”라고 씌여져있었습니다. 저는 그 대련을 밤낮으로 쳐다보면서 중국이 도대체 뭘하려 하는가에 대해 일정한 료해가 있게되였습니다.

[사회자] 1964년에 양진녕은 미국국적에 가입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중국적이였습니다. 그것은 일찍 정신적인 곤혹을 겪은 원인에서였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가 당년에 걸어간 길을 더듬어봅시다. 1945년9월에 한달간의 바다항행을 거쳐 양진녕과 다른 20여명 중국류학생들은 미국뉴욕에 도착했습니다. 1946년 양진녕은 시카코대학 류학생으로 등록했습니다. 그가 시카코 대학에 등록한 원인은 그가 경모하는 물리학대사 비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였습니다.

[증도] 학생시대에 선생님께서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있는 과학대사 이를테면 아인슈타인, 비미와 같은 사람들에게 경모의 심정을 품고 있었지요. 미국에 간후 그런 대사들과 직접 접촉하게되였고 심지어 그런 대사의 제자로 되였는데 이런 대사들과의 접촉은 선생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양진녕] 그 세분중에서 제가 가장 익숙히 알고있는 분은 물론 비미였습니다. 한것은 그분이 시카코대학에서의 저의 선생님이였고 제가 일찍 말한적이 있는데 그분이 사람들을 탄복케 하는것은 그분이 두다리로 땅우에 서있는다는것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절대적으로 믿음성이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분은 한마디 말이라도 쉽게 하지않고 중요한 근거가 있어야 말합니다. 그외 저한테 인상이 깊은 분이라면 아이더화. 타이러입니다. 저와 함께 학습할때 타이러는 마흔살이 안됐는데 마흔살이 잘돼보였습니다. 그는 최근에 돌아갔는데 90살이 다 됐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상당히 이름이 났댔습니다. 후에 이름이 나게된것은 그가 수소탄의 아버지로 변한 다음이였습니다.

[증도] 그들은 어떤 부동한 성격특징이 있나요?

[양진녕] 타이러는 특점이 있는데 비미와 상반대입니다. 타이러는 궁리가 대단히 많아서 하루에도 평균 10개의 새궁리를 생각해내는데 그 중에서 9개반은 다 엉터리궁리입니다. 그러나 물리연구에서 매일마다 괜찮은 궁리 반개씩 생각해낸다는것도 대단한것입니다. 그에게 또 하나의 특점이 있는데 중국의 전통적인것과 같지않습니다. 중국의 전통으로 말하면 함부로 말하지 말고 똑똑히 알기전에는 아무데서나 말하지 말라는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궁리가 많을 뿐더러 남들과 토론하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는 복도에서도 아는 사람을 붙잡고 오늘 분자에 대한 새로운 료해가 있다면서 한참씩 연설을 합니다. 그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는 대수롭지않게 생각하고 또 아주 달갑게 의견을 접수합니다. 만약 정확한 의견을 제기하면 그는 다시 토론하고 의의가 있는 문장을 써냅니다.

[증도] 지금 와서 돌이켜볼때 선생님이 시카코대학에서 학습한 그 한단락이 아주 중요한 경력이 아니였나요?

 [양진녕] 어린시절을 제외하고 두차례의 중요한 과정이 있었는데 하나는 서남련대에 있을때고 하나는 시카코에 있을 때입니다. 이 두 시기는 저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친 시기입니다. 첫번째 과정에는 이전의 중국의 방법대로 많은것들을 배웠는데 아주 견고하게 잘 배웠습니다. 저와 동시대에 배운 미국동학들보다 더 견고하게 배웠지요. 그런 토대에서 미국에 갔는데 시카코대학에서는 이런것들을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때 잘 익혀지지않은것들을 연구하고있었습니다. 저는 그런것들에 대해 특별히 주의했고 온종일씩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것들은 저에게 새로운 교훈을 주었습니다. 저는 정말 행운아였습니다. 그 두가지 방법을 결합했는데 그후의 저의 사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회자] 비미의 지도하에 양진녕은 실험물리방면에서 연구를 시작했는데 비미의 소개로 애리슨실험실에서 가속기의 실험사업을 할수있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가속기실험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자] 타이러의 건의에 쫓아 양진녕은 리론물리연구로 연구방향을 돌렸습니다. 1958년부터 1979년까지 양진녕은 푸린스둔대학 등 6개 대학의 리학박사학위를 탔고 선후로 푸린스둔고급연구원 연구원과 푸린스둔대학 교수, 미국과학원 원사, 영국황가학회 회원으로 됐습니다. 1966년부터 양진녕은 뉴욕주립대학석계분교애인스탄강좌 교수 겸 리론물리연구소 소장으로 되였습니다.

[증도] 선생님의 시카코대학에서의 회억을 본적이 있는데 한단락은 아주 재미있더군요. 애리슨실험실에서 웃음거리가 있었다면서요. 무릇 실험실에서 폭발소리가 나는곳이면 무조건 양진녕이 있었다는 이야기얘요. 정말 그랬나요?

[양진녕] 이를테면 일부 전자의기가 있었는데 그런 전자의기는 아주 복잡해서 자칫 잘못하면 자꾸 고장이 났습니다. 고장이 나면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설계도를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실험하는 동학들을 보니 그들이 발로 걷어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발로 차봤는데 쓸데없었습니다. 때문에 실험하는 사람들은 기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문제있는 곳을 찾아내야 한다는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세시간씩 찾아봐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찍 이런 말을 했습니다. 18개월, 20개월씩 실험실에 붙어있은것이 쓸모가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저는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정신은 50년대에 제가 연구사업을 하는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놀았습니다. 때문에 그때 열몇달씩 애리슨실험실에 붙어있은것이 헛수고가 아니였습니다.

[사회자] 푸린스둔고등연구원이라는 이 세계에서 저명한 수리성지에는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학자들이 집중해있었는데 대물리학가 애인스탄도 당시 그곳에 있었습니다. 1949년에 양진녕은 그곳에 가서 연구사업을 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일년후 소장 오우번하이머는 그에게 5년동안 계속 연구하라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한차례 아름다운 해우는 그로하여금 그곳에서 17년이나 있게했습니다. 

 [증도] 지난세기 50년대에 선생님께서는 오우번하이머의 건의에 쫓아 푸린스둔에 남게되였다는데 정말인가요?

[양진녕] 푸린스둔에서 일년, 아니…반년이 좀 지났을가 할때 시카코에서 요청이 왔는데 저더러 시카코로 오라는것이였습니다. 오우번하이머는 다시 5년동안 저를 남기기로 했다는것이였습니다. 푸린스둔고등연구원은 당시 리론물리연구가 비교적 활약적인 곳이였습니다. 때문에 학술적 립장에서 말하면 푸린스둔고등연구원에서 리론물리를 연구하는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러나 시카코에도 두가지 좋은점이 있었습니다. 학교의 위치가 연구소보다 장기적으로 비교적 온당했습니다. 마지막에 저는 그래도 푸린스둔에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1949년 가을에 저는 푸린스둔으로 갔습니다. 몇달후 크리스마스 휴가일에 저는 한 호텔에서 두치례를 만났는데 두치례는 이전에 제가 련대부중에서 교학할때의 학생이였습니다. 홍콩에서 우리는 파티라고 불렀는데 대륙에서는 지금 데이트를 뭐라고 부릅니까?
[증도] 련애한다고 하지요. 약속이라고 하나요.

설] [양진녕]  약속, 그때는 제가 두치례를 사랑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1950년 봄에 저는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는 당시 뉴욕에서 학습하고 있었는데 푸린스둔이 뉴욕과 아주 가까왔기에 저는 푸린스둔에 남기로 결정한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절점이였습니다. 우리는 그해 8월에 결혼했습니다.

] [사회자] 두치례는 저명한 장령 두지명의 딸이였습니다. 결혼후 그들은 푸린스둔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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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1971년에 처음으로 귀국할때 양진녕은 옛동창생 등가선을 만났습니다. 그전에 양진녕은 국외의 신문에서 등가선이 중국 원자탄과 수소탄 연구제작사업에 참여하고 있다는것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상해에서 있은 고별만찬에서 양진녕은 등가선이 북경에서 인편으로 보내온 편지를 받았는데 원자탄은 순전히 중국사람들이 제조한것이라는 내용이 씌여져있었습니다. 그때 양진녕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금할수 없어 부득불 좌석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증도] 1964년에 중국에서는 원자탄 폭팔에 성공했는데 그 중에는 중요한 공신 등가선선생님이 있지요. 그분은 선생님과 동창생이라지요. 1971년에 처음으로 조국에 돌아올때 선생님께서는 중국의 원자탄연구과정에 대해 관심이 없으셨나요?

[양진녕] 다른 하나의 배경이라면 1964년에 원자탄 시험폭팔을 한후 미국신문들에서는 즉시로 여러가지 보도를 했습니다. 그중 중국에서 원자탄에 기여한 사람이 누군가하는 보도가 있었는데 거기에 등가선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 외 또 한춘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모주석이 섬북에 비행기를 보내여 한춘을 북경에 청해다가 원자탄 만드는것을 돕게 했다는 보도였습니다. 저는 이런 소식을 다 알고있었습니다. 때문에 등가선을 만났을때 이속에 어떤 문제가 있기에 토론하지 않기로 하고 그저 지금 어느 곳에서 사업하는가고만 물었습니다. 그는 외지에서 사업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묻지않았습니다. 후에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돌아갈때 저는 참지 못하고 물어봤습니다.

저는 한춘이야기는 꺼내지않고 그저 중국의 원자탄이 정말 순전히 중국사람들이 만들었다는것이 옳은가고만 물었습니다.그는 자기의 인상에 의하면 중국사람이 만든것이 옳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증실해 보아야겠다고 말했습니다. 후에 등가선 부인의 말을 들었는데 등가선이 보고를 썼는데 그 보고가 주은래총리한테까지 올라갔다는것이였습니다. 주총리는 응당 바른 말을 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등가선은 편지를 쓴것입니다. 가석하게도 그 편지를 저는 찾을길이 없습니다. 그는 저한테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 그는 처음에 쏘련에서 좀 도와준 외에 주요한 사업은 모두 중국사람들 자체로 한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이미 상해를 떠났기에 그들은 한사람을 파견하여 저한테 보내온것이였습니다. 그 편지를 본후 저는 감정상에서 커다란 진동을 느꼈습니다.

[증도]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당시의 일을 어떻게 생각했나요?

[양진녕] 감정충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일이 아주 복잡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이 19세기에 받은 모욕은 저의 아버지세대의 지식인이거나 우리 세대의 지식인이거나 령혼심처에 마멸할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고 저는 늘 생각하고있었습니다. 이런 인상은 당시 제가 받은 충격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당연히 여기에는 또 다른 한층의 뜻이 있는데 등가선이 아주 중요한 일을 했다는것입니다. 등가선은 저의 어린시절의 아주 익숙한 친구입니다. 때문에 이런것들이 다 한데 어울려져 있었는데 총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본 마음이 드러난 일입니다.

[사회자] 1986년 7월에 등가선은 서거했습니다. 등가선의 부인 허로서에게 보내는 전보문에 양진녕은 이렇게 썼습니다. “가선은 사람이 충성스럽고 순정하며 내가 가장 경애하는 친밀한 벗입니다. 그의 사심이 없는 정신과 거대한 기여는 부인과 나의 영원한 자랑입니다. ”  1971년부터 양진녕은 여러차례 중국에 와서 친척방문을 하고 강좌를 했으며 중미과학기술교류와 합작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94년 6월 양진녕은 중국과학원 첫번째 외국적 원사로 되였으며 1998년 6월에는 청화대학으로부터 영예교수직위를 수여받고 1999년 5월21일에 정식으로 퇴직휴양하였습니다. 같은 날 양진녕이 일찍 사업했던 석계분교리론물리연구소를 “양진녕리론물리연구소”로 정식 명명했습니다. 그 해에 그는 석계분교로부터 일등영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2000년 이후 양진녕은 락엽귀근하여 자기가 자라난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증도] 양진녕선생님은 자기의 령혼심처에서 고려가 가장 많았던 문제는 자신의 중국뿌리와 미국국적에 관한 문제였다고 말했어요. 이 일은 절대다수 국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몸부림일것이얘요. 지금 양선생님은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한것은 그가 옛고향으로 돌아왔고 조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얘요. 그는 귀향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어요. 

“ 그제날 멀리로 떠나갔다가
아흔에 다시 돌아왔는데
따져봐도 모두가 뜻했던대로라
내 마음 진정 하늘에 솟는구나
신주가 새단장하려니
고향의 사명 무거워라
고령에 새사업 벌리여
귀향의 늙은 꽃으로 지리라”

이 시는 그의 진실한 마음의 반영이였어요. 한세대의 과학대사로서 양진녕은 필생의 정력과 심혈을 과학에 바쳤어요. 우리는 이 세기로인을 축복하면서 그의 창조업적과 그의 인생이야기를 명기하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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