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吉林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76년:10월의 승리 > 력사사건

본문 바로가기
전체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76년:10월의 승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3-01-18 08:18| 조회 :1,590| 댓글 :0

본문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76년:10월의 승리



1976은 중국사회가 격렬한 요동을 치던 한해였습다. 이 한해동안 중국에서는 세계를 놀리우는 일련의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1월 8일, 주은래총리가 서거했습니다. 4월 인민군중들이 주은래를 추도하고 4인무리를 반대하는 4. 5운동이 발생한 후 등소평은 착오적으로 당내외 일체 직무를 철소당했습니다.   7월 6일, 전국인대상무위원회 위원장인 주덕이 서거했습니다.  7월 28일, 하북당산일대에 강렬한 지진이 발생하여 인민생명과 재산이 거대한 손실을 입게되였습니다.  9월 9일, 당과 국가 군대의 주요 창건자이시며 지도자인 모택동이 서거했습니다. 나라는 모두 거대한 비통에 잠겼습니다.  

635712248_9e2813fa_u3D2186292232C25732341976년 1월 8일, 주은래 총리가 서거했습니다. 사람들은 무한한 비통으로 여러가지 방식을 통해 자기의 애도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4인무리는 군중의 추모활동을 극력 압제함과 아울러 1975년 10월 이후  전국범위에서 우경번안풍을 반격하는 정치운동을 일으켜 등소평과 기타 일부 중앙령도동지들의 령도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한시기 호전됐던 정치, 경제형세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3월말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은 청명절날  선렬들을 그리는 전통습관을 리용하여 자발적으로 수도 천안문광장에 모여 주총리에 대한 추모와 4인방의 역행을 통책했습니다. 남경, 항주, 정주, 태원 등지에서도 주은래총리를 추모하고 4인방을 반대하는 성세호대한 군중운동이 폭발했습니다.   

4월 4일 청명절, 북경의 추모활동은 고조에 달했습니다. 수십만 군중이 첩첩한 금지령도 마다하고 천안문광장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정치국사업을 주관하고 있던 화국봉은 북경에 있는 부분 정치국위원을 소집하여 련일내 상황을 연구했습니다. 강청 등의 좌우지하에 회의는 천안문광장의 군중운동은 계획있고 조직있는 반혁명성격의 운동이며 반혁명이 군중을 선동하여 이 기회를 빌어 주석과 중앙을 반대하며 투쟁의 대방향을 저애하고 파괴하는 투쟁이라고 했습니다.

강청 등은 무리하게  청명이 지났으니 밤새로 화환을 옮기고 반혁명연설을 하는 자들을 붙잡아야 한다고 제기했습니다. 4월 5일 사람들은 계속해서 천안문광장에 밀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드린 화환을 거둬가고 사람을 붙잡는다는 소리를 듣고 분개하며 화환을 돌려주고 전우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면서 일부분 민병과 경찰 그리고 전사들과 엄중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4월 6일 이른 아침 부분적 정치국위원들은 북경시당위의 천안문사건에 대한 회보를 청취하고 군중의 행동은 반혁명폭란성격이라고 여기고 계속해서 민병을 조직하여 천안문 광장부근에서 대기하게 하고 위수부대를 파견하여 수시로 기동할수있도록 명령했습니다. 모원신은 서면으로 모택동에게 정치국회의결정을 보고했는데 모택동은 동의했습니다.

4월 7일 모원신은 두차례나 모택동에게 상황을 회보하였습니다. 모택동은 인민일보기자가 천안문사건에 관한 소위 현장보도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는데 대해 동의했습니다. 요문원에 의해 발표된 이 현장보도는 죄명을 날조하고 군중들이 주총리를 추모하는 활동을 반혁명활동이라고 모욕했으며 천안문에서 발생한 사건은 반혁명정치사건이며 당전 등소평비판과 우경번안풍을 반격하는 대방향을 돌려세우려는 망상이라고 했습니다.

모택동은 등소평의 일체직무를 철소하고 당적을 보류하여 후를 기다리며 3중전회에서 심의비준할것을 표시했습니다. 모택동은 또 화국봉을 총리로 임명할것을 제출했습니다. 그날 오후 모원신은 모택동에게 그가 내린 지시에 대한 정치국  집행상황을 회보했습니다. 아울러 저녁에 중공중앙의 두개 결의 를 방송할 문제를 청시했습니다.  화국봉을 국무원 총리로 임명한다는 결의를 이야기할 때 모택동은 보충하여 또 당의 제1부주석으로 임명하며 이를 결의에 써 넣으라고 했습니다.

저녁에 중앙정치국은 회의를 열고 중공중앙 두개 결의를 선독하고 통과했습니다. 첫번째 결의의 내용은 위대한 수령 모주석의 제의에 근거하여 중앙정치국은 화국봉을 중공중앙 제1부주석, 국무원 총리로 임명할것을 한결같이 통과한다는 것이였고 두번째 결의의 내용은 중앙정치국은 천안문광장에서 발생한 반혁명사건과 등소평의 최근의 표현이였는데 등소평문제의 성격은 이미 대항성적인 모순으로 변했다고 인정했습니다.

모주석의 제의에 근거하여 정치국은 등소평의 당내외 일체직무를 철소하고 당적을 보류하며 후를 기다린다는 것이였습니다.  한시간 후 중앙인민방송국에서는 전국에 이 두개 결의를 방송했습니다.

천안문사건을 대표로 하는  주총리를 추모하고 4인무리를 반대하는 강대한 항의운동은 실제상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당의 정확한 령도를 옹호하는것으로서 이는 후날 강청반혁명집단을 분쇄하는데 튼튼한 군중기초를 다져주었습니다. 

9월 9일 당, 국가, 군대의 주요 창건자이며 지도자인 모택동이 서거했습니다. 온나라가 거대한 비통에 잠겼습니다. 전당 전군과 전국 여러민족 인민들은 자기의 령수를 잃은데 대해 비통을 느끼는 동시에 당과 국가의 전도에 대해 근심하게 됐습니다. 모택동이 서거한 후 4인무리는 당과 국가의 최고령도권을 찬탈하려는 음모활동을 바싹 틀어쥐였습니다.

 9월 11일 왕홍문은 중앙판공청 당직실을 뛰처나와 중남해에 다른 당직실을 설치하고 당중앙과 각지의 련계를 차단하여 전국을 지휘하려 했습니다. 4인무리는 그 친신들을 사촉하여 상해 민병들에게 무기를 내주어 무장시켜 상해로 하여금 그들이 당의 권력을 탈취할 기지로 만들려고 시도했습니다.  

     4인무리는 당의 착오를 리용하여 문화대혁명에서 형성되고 발전한 당내 파벌조직과 당과 국가의 최고권리를 찬탈하려 음모를 꾸민 반혁명집단으로서 당과 국가의 전도와 운명을 엄중하게 위협했습니다. 4인무리를 제멋대로 날뛰는 파벌활동에 대해 모택동은 생전에 여러차례 엄격하게 비판했습니다.

당시 중공중앙 제1부주석이며 국무원 총리인 화국봉은 4인무리가 당의 권력을 탈취하려는 음모와 견결한 투쟁을 진행하여 격리심사의 방식으로 4인무리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출하였는데 엽검영, 리선념, 왕동흥 등 중앙지도자들의 찬동과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상론한 후 중공중앙정치국의 다수동지들의 동의를 얻고 당과 인민의 의지을 집행하고 4인무리에 대해 과단한 조치를 취할것을 결정했습니다. 

10월 6일 화국봉과 엽검영 등은 중남해회인당에서 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를 여는 형식으로 왕홍문, 장춘교에 대해 격리심사한다고 선포하고 동시에 강청 요문원에 대해서도 격리심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한시간도 안되여 총한방 쏘지 않고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일거에 4인무리를 분쇄했습니다.

이번 투쟁에서 화국봉, 엽검영, 리선념 등은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습니다. 당중앙에서는 또 유력한 조치를 취하여 상해의 골간분자들이 무장폭란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분쇄하고 4인무리의 기타 각지의 골간분자들에 대해서도 과단한 조취를 취함으로써 전국정치국세를 안정시켰습니다.

10월 18일 중공중앙은 정식으로 전체 당원들에게  4인무리를 분쇄한 소식을 공포하자 전국 억만 군중들의 옹호를 받았으며 온 중국은 들끓었습니다. 많은 대중도시의 폭죽은 다팔렸으며 크고 작은 술매대에는 기나긴 대렬로 북적거렸습니다. 10월 21일 수도 150만 군민들은 천안문광장에서 성세호대한  경축시위가 거행됐으며 4인무리를 분쇄한 력사적인 승리를 환호했습니다.

련속 며칠간 전국 각 성, 자치구, 직할시 및 인민해방군 각 부대는 분분히 대집회와 시위활동을 벌렸는데 그 수는 연인수로5000여만명에 달합니다. 향항, 오문의 각계 애국동포들도 경축활동을 거행했습니다. 

4인무리의 분쇄는 문화대혁명재난을 결속지었으며 위험속에서 중국사회주의 사업을 만구했고 당과 국가가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는 것을 위해 전제를 창조했으며 공화국력사의 한페지를 번졌습니다.

635712248_d892a50b_635712248_1b8597e0_fe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력사사건 목록

Total 53건 1 페이지
력사사건 목록
천리 결승--새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제 5 집 인기글 천리 결승--새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제 5 집 (남)해설원: 1975년 7월 원 국민당 제12병퇀사령 황유가 특사를 받았다. 그는 공덕림전쟁범관리소 대문을 나서면서 생각지 못한 한가지 요구를 제기했는데 하북의 서백파로 가보련다는 것이였다. 그는 공산당은 지휘소를 서백파에 설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공산…(2013-02-04 09:55:11)
인민페의 탄생-새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제4집) 인기글 인민페의 탄생-새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제4집) (남)해설원: 하북성 섭현 서쪽에는 깎아지르는듯한 절벽에 웅위로운 공중루각이 한채 있는데 이를 왜황궁이라고 부른다. 왜황궁과 멀지 않는 곳에 일부 작은 건물들이 있는데 그것은 여러 개 비석들로 이루어 졌는데 이곳에 항일영웅 좌권장군이 모셔…(2013-01-31 09:09:34)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90년: 포동개발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90년: 포동개발 1990년 4월18일에 당중앙과 국무원에서는 상해시 포동지구개발을 다그칠데 관한 중앙의 결정을 정식으로 반포했습니다.포동은 황포강동쪽, 장강구 서남쪽, 천양하 북쪽으로…(2013-01-24 11:03:20)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9년: 희망공사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9년: 희망공사 “난 또 학교를 다니게 되였습니다.” 자그마한 여린 손이 흑판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이는 비단 배움의 기회를 잃은 아이들이 다시 학교로 오게된 기쁜 심정을 표달했을 뿐만아니…(2013-01-24 10:47:12)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7년: 력사적 사회발전단계를 정확히 확정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7년: 력사적 사회발전단계를 정확히 확정 1987년 10월25일부터 11월1일까지 중국공산당 제13차전국대표대회가 북경에서 개막되였는데 전국 4600만 당원을 대표하는 1936명의 대표가 대회에 출석했습니다. …(2013-01-24 08:58:11)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7년: “863” 계획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7년: “863” 계획 1986년3월3일 “세계고신기술발전을 따라갈데 관한 건의” 한부가 중공중앙에 올라갔습니다. 후에는 그 보고에 근거하여 중국고신기술연구와 발전에 심원한 영향을 끼…(2013-01-24 08:45:09)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5년: 백만대군축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5년: 백만대군축 1985년에 중앙군위에서 내린 백만대군축결책은 중국인민해방군이 당과 국가의 사업중점을 사회주의현대화건설에로 옮기는 전략적결책을 관철시달하기 위한 중대한 행동…(2013-01-24 08:21:32)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4년:경제리론의 새로운 돌파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4년:경제리론의 새로운 돌파 1984년 당중앙12기3중전원회의에서는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을 통과했습니다. 결정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전반 경제체제개혁중의 일련의 중대한 리론과 실천문제를…(2013-01-23 09:38:16)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3:통일대업의 위대한 구상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3:통일대업의 위대한 구상근대의 중국은 비바람속에 시달리고 굴욕을 받았으나 중국인민은 민족독립을 쟁취하고 국가의 주권과 령토완정 및 민족의 존엄을 수호하기 위하여 백여년을 끊임없이 분투하여 왔습…(2013-01-23 09:21:41)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2년: 중국농민의 위대한 창조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2년: 중국농민의 위대한 창조 1982년 1월 1일 중공중앙에서는 1호문건을 발급했습니다. 우리 나라 농촌에서 나타나고 있는 농호별생산량도급제 등 여러가지 형식의 생산책임제를 긍정한것입니다. 사회주의 집체경제의 …(2013-01-23 09:01:44)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2년: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강령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2년: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강령 1982년 9월 1일부터 11일까지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가 북경에서 성대하게 개막되였습니다. 등소평이 대회개막식을 사회하고 동시에 개막사를 드렸습니다 그는…(2013-01-23 08:54:18)
렌즈속의 기억-공화국발자취 1981년: 지도사상에서의 혼란상태수습의 승리적인 완수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발자취1981년: 지도사상에서의 혼란상태수습의 승리적인 완수11기3차 전원회의후 우리 당은 장기적으로 내려온 좌적사상을 청리, 규정하고 사상, 정치, 조직, 경제 등 령역에서 혼란한 상태를 바로잡기 시작했습니다. 문화대혁명 및 건국이…(2013-01-21 08:10:53)
렌즈속의 기억-공화국발자취 1980년: 정치제제개혁의 발걸음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발자취 1980년: 정치제제개혁의 발걸음 1980년 8월 18일 등소평동지가 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한 “당과 국가의 령도제도의 개혁”이라는 중요연설은 새시기 당과 국가의 령도제도개혁에 방향을 기리켜주었습니…(2013-01-21 07:41:55)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77년:대학입시 문을 다시 열다.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77년:대학입시 문을 다시 열다 매년 여름철이면 중국에서는 모두 전국적인 대학입시를 맞이합니다. 이는 중국에서 목전 규모가 제일 크고 백성들의 인정도가 가장 높은 최고인재선발 제도로서 무수한 청년…(2013-01-18 08:20:53)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76년:10월의 승리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76년:10월의 승리 1976은 중국사회가 격렬한 요동을 치던 한해였습다. 이 한해동안 중국에서는 세계를 놀리우는 일련의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1월 8일, 주은래총리가 서거했습니다…(2013-01-18 08:18:25)
게시물 검색

Copyright © 2005 인터넷길림신문 all rights reserved. 吉ICP备07004427号

本社: 長春市綠園區普陽街2366號 Tel: 0431-8761-9812 分社: 延吉市新華街2號 Tel: 0433-253-6131

記者站: 吉林 (0432) 2573353 , 通化 (0435) 2315618 , 梅河口 (0448) 4248098 , 長白 (0439) 8220209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