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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페의 탄생-새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제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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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3-01-31 09:09| 조회 :3,79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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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페의 탄생-새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제4집)



 (남)해설원:   하북성 섭현 서쪽에는 깎아지르는듯한 절벽에 웅위로운 공중루각이 한채 있는데 이를 왜황궁이라고 부른다. 왜황궁과 멀지 않는 곳에 일부 작은 건물들이 있는데 그것은 여러 개 비석들로 이루어 졌는데 이곳에 항일영웅 좌권장군이 모셔져 있고 그 옆에 고첩성렬사비가 있다. 좌권장군과 달리 고첩성렬사는 싸움에는 능하지 않으나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한 공산당 간부들중 극히 희소한 금융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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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첩성은 복건장주사람으로서 일찍 하문대학에서 경제를 배웠다. 홍군이 장주로 쳐 들어 갔을 때 그는 돈가계에서 심부름을 하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해 홍군에 가치가 40만에 달하는 물자를 보냈다. 홍군에 참가한 후 고첩성은 모택민의 찬양을 받았으며 쏘베트국가은행 회계과장을 담임했다. 아울러 홍군을 위해 첫부의 회계제도를 건립했다.  1943년 희생될 때 그는 진기로예근거지 은행행장을 담임했다.  

    고첩성렬사와 동문인 첫장의 인민페를 소장한 석뢰동지는 지금 북경천안문광장 서쪽인 서교민항에 거주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우러르는 마음을 안고  석뢰로인을 찾았다. 퇴직하기 전 석뢰동지는 중국인민은행 발행국 부국장으로 있었다. 제일 첫장의 인민페탄생을 이야기 하자 로인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남)석뢰:12월 1일 우리는 밥을 먹고 석가장분행에 보내여 발행하려 준비했습니다. 막 나르고 있는데 평산은행에서 돈찾으려 왔지요. 나는 그들과 매우 익숙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들에게 50원짜리 지페를 드렸지요. 저는 인민은행 준비사업과 건립을 기념으로 남기려고 돈을 내서 그 돈을 샀지요. 그 돈은 지금도 보존하고 있습니다. 

(남)기자:볼수가 있을가요?
(남)석뢰:물론이지요.이것은 인민은행 성립이고 제가 조사한 당안자료는 모두 그 안에 있습니다.
(남)해설원:이 진귀한 돈은 석뢰로인으로 보면 한 시대를 여는 시작이였고 또한 부름이였다. 진시황이래 통일국가의 중요한 표지의 하나였는데 곧 통일된 화페였다.
(남)석뢰:이것은 당년 제가 보존한 50원짜리 돈입니다.후에 사람들이 이 돈을 사려 했는데 저에게 몇십만원을 주려 했지요.저는 안팔렵니다. 
(남)해설원:  번호가 1호인 이 인민페는 하나의 통일된 새중국이 오라지 않아 탄생된다는 것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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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석뢰:이는 50원짜리 지페입니다. 이 글자는 1, 2, 3하는 로마 글자입니다. 1, 2, 3 이것은 00000001 모두 8자리입니다. 앞에 7개 령이 있습니다. 원래는 번호기로 찍어야 하는데 번호기가 없으므로 이 번호기는 6자리입니다. 이  6자리는 100만자밖에 찍지 못했지요. 당시 지페모형판을 만들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의논한 후 다른 번호기를 뜯어 두자리를 가져다 함께 놓고 찍었지요.이것은 물을 뿜는것이고 이는 탄광입니다모주석께서는 자기의 초상을 인쇄하지 말라 했습니다.해방구의 생산상황을 쓰라했지요.

(남)기자: 원래 모주석초상을 새기려 했는데 모주석께서 동의하시지 않았군요.
(남)석뢰:찍었다가 작페해버렸죠.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편지를 써서 이 인민페를 사려 했습니다. 이는 력사문물이기에 저는 팔지 않습니다.그들이 값을 얼마 불렀는지 아십니까?50만입니다.50만으로 이 50원을 바꾸려 합니다.저는 싫습니다.왜냐면 이 돈은 중국인민은행의 력사이고 또 국민당을 소멸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돈이 발행된 후로부터 국민당의 돈은 끝장났지요. 세계 여러나라 중앙은행에도 이 첫장의 돈을 보존하지 못했지요.
(남)기자:당신이 보관했기에 우리 중국에 하나 밖에 없는 이 돈을 보존하게 되였구만요.

635712248_90c41d83_E3E6F1E92623222693B26(남)해설원:서백파의 한 보통농가뜨락, 한 보통주택, 한 보통 책상이다. 벼루도 보통이고 붓도 보통이다. 그러나 이 보통책상에서 1947년 말  한 만청의 수재는 보통붓과 먹으로 극히 평범하지 않은 “중국인민은행”이라는 6글자를 써냈다. 이 작은 집의 주인이 바로 동필무였다.

해방전쟁에 수요되는 물자자원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7년 봄과 1948년 봄 중공에서는 한단과 석가장에서 두차례의 중요한 회의를 했는데 이를 각기 화북재정회의와 석가장 금융무역회의라고 부른다. 이 두차례회의를 중공당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이 두차례 회의를 중국공산당이 최종 전국승리를 탈취하는데서 극히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당시화북재정회의산동대표단성원 양파:일본이 투항한 후 점차적으로 화북지구는 여러 해방구와 서로 련계되였습니다. 당시는 국민당이 정식으로 “쌍십협정”을 파괴하고 대규모의 내전을 일으키는 시기라 우리는 국민당의 진공을 막아야 했고 자위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자위애국전쟁이라 했지요. 아울러 대병퇀작전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각 해방구의 재정사업은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했지만 그러나 각 지구상 이미 련계가 있었습니다. 지페가 부동하고 또 어떤 때에는 봉쇄 당해 무역과 물자교류가 통일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왜서 진찰기변구에서 이 문제를 제출했겠습니까? 화북에서는 주로 기중에 가서 물자를 구입했지요. 이렇게 되여 압력이 매우 컸습니다. 때문에 진찰기 중앙국에서는 재정회의를 소집하고 경험을 총화하면서 방침과 정책을 통일하여 지구지간의 물자교류를 윤활하게 하려 했지요. 이래야만 력량을 집중하고 보조를 맞추어 해방전쟁을 지원할수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제출됐고 또 회의를 소집했던것입니다. 진찰기중앙국은 1946년 12월 30일 중앙에 전보를 보냈으며 47년 1월 3일 중앙에서는 답복했습니다. 중앙에서는 진찰기중앙국의 전보문을 동의한다고 했습니다.  “이 건의는 아주 좋다. 회의를 소집하는 것을 동의한다.” 그러나 회의 지점에서 진찰기중앙국은 기중에서 회의를 열려고 했으나 중앙에서는 한단에서 열자고 했습니다. 

(남)해설원:20여년래 각 해방구에 분산돼 있던 공산당재정금융전문가들이 진기로예해방구 야도진에 모여 전쟁보장경험을 참답게 총화하고 각 해방구의 재력 물력 인력 동원과 교류의 가능성을 분석하며 전쟁을 보장하는 경제부담원칙과 대병퇀작전이 가져다 주는 보급곤난이 전쟁의 진행을 제약하는 등 요소들을 제정했다. 

이러한 곤난을 해결하기 위해 승리의 천평은 대다수 농민리익을 대표하는 중국공산당에 쏠리게 해야 했다. 동필무가 도야진에 도착했을 때는 화북재정경제회의가 이미 거의 끝날 무렵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정력을 집중하여 해방구 여러대표단 단장들과 어떻게 회의결의와 문제 그리고 화북재정판사처를 건립할 사항들을 론의했다.

(남)당시화북재정회의산동대표단성원 양파: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이 있었으니 곧 여러분의 요구에 근거해서 화북재정련합조직을 성립하는 것입니다. 금후 중앙에서 화북재정판사처를 정한 후 이것으로 여러 개 해방구의 정책 방침을 조절하려 했습니다. 때문에 이번 회의 결속 후 중앙에서는 10월에 비준을 내렸죠. 화북재정회의 규정에 따라 화북재정판사처를 성립하기로 결정했으며 동필무를 주임으로 임명하고 각개 해방구대표을 부주임으로 임명했습니다.

(남)해설원:한시기 준비단계를 거쳐 1947년 8월 동필무를 주임으로 한 화북재정판사처가 정식으로 판공을 시작했다. 새로 성립된 화북재정판사처는 8가지 임무가 있었는데 그중 여러 해방구의 화페발행과 중앙재정은행건립을 장악하는것이 포함되여 있었다. 1947년 12월 12일 동필무는 당중앙에 전보를 보내 중앙에서 중앙은행성립을 비준할것을 건의함과 아울러 중국인민은행이라는 이 이름을 사용할것을 건의했다. 반달 지난 후 중앙에서는 그의 건의를 비준했다. 

(남)중공중앙문헌연구실 양서광:저는 동필무가 화북재정판사처를 주관하면서 가장 큰 공헌은 곧 중국인민은행성립 준비사업을 했으며 전국통일의 인민페를 발행한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사업은 당시에 실제의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심원한 력사적의의가 있습니다. 그는 높이서서 멀리 내다보시였습니다. 그이께서는 우리 해방전쟁이 재빨리 전국성적인 승리를 거둘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남경에서 연안으로 철거할 당시 장치중에게 “다시 만날 날이 오래지 않을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며 그는 여러면을 분석하여 우리 해방전쟁이 매우 빨리 승리를 거둘것이기에 서백파로 온뒤 인차 손을  대 중국인민은행성립과 인민페 인쇄사업에 착수했던 것입니다.

(남)해설원:1947년 늦은 가을 서백파에서 1킬로메터에 상거한 협욕촌에 정식으로 중국인민은행 준비처 간판을 걸었으며 일찍 섬감녕변구 재정청장과 화북은행총경리를 담임했던 남한신을 제1임 행장으로 임명했다. 하송정과 석뢰 등도 준비사업에 참여했다.   

(남)중공중앙문헌연구실 양서광:중앙의 비준을 얻은 후 동필무는 사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친히 진찰기인쇄국과 인쇄공장에 가서 그곳의 인쇄기술을 조사연구한 후 이곳에서 능히 우리의 인민페를 인쇄할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635712248_860f3aa4_E3E6F1E92623222693B26(남)해설원:만약 친히 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낡은 흙집이 인민페를 탄생시킨 곳이라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10리 양장의 상해나 오동나무 우거진 남경 그리고 상업이 운집돼 있는 북평에 비해 눈앞에 정경은 그야말로 너무나 간편하고 너무나 초라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을 13억이 사용하는 인민페와 련계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첫 인민페가 확실히 이 편벽한 산촌에서 또 이 몇칸의 조용한 집에서 탄생했다.  남욕촌의 인쇄공장의 간편한 설비에 비해 국민당의 지페 찍는 기계는 매우 선진적이였으며 또 매우 바쁘게 돌아갔다. 국민당정부가 87%의 수입을 모두 내전에 썼으므로 거대한 재정지출은 국민당으로 하여금 부득불 지페를 대량으로 찍어내는것으로 응부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당시 지페인쇄의 속도는 일찍 매분에 천6백만장 찍어내는 보기 드믄 기록을 창조했는데 그 결과는 법페와 국민당화페가 급속히 하락하게 했고 상해의 길거리에서 거지들도 만원짜리 돈을 가지고 다녔다. 당시 미국련합사에서는 일찍 법페구매력의 변화를 피력한바 있다.  1백원 법페로 계산하여 1937년에 소 두마리,  1938년에는 소 한마리, 1941년에는 돼지 한마리,  1943년에는  닭 한마리,  1945년에는 고기 한마리, 1946년에는 닭알 한알,  1947년에는 3분의 1 성냥 한통에 해당된다.

8월 5일 출판된 대공보에 의하면 더욱 엄중한 것은 모두들 이번 경제위기는 이미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다고 한다. 그 누구도 밝은 앞날을 생각하지 못하고 말일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계산할 수밖에 없었으며 깊은 수렁이속에 빠진 국민당통치구의 인민들은 불구덩이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위기는 장가왕조의 철저한 멸망의 신음소리를 은은하게 울렸다.

류등대군이 대별산에로의 진군으로부터 열리게 된 중국해방전쟁의 반공 서막으로부터 동필무가 첫인민페에 제사를 쓴지 근근히 반년시간이 지났다. 또 반년이 거의 됐을 무렵인 1948년 5월 모택동은 서백파로 오셨으며 중앙은 서백파에서 제1차 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했는데 력사에서는 이를 “9월회의”라 부른다. 회의의 중요한 내용은 생산을 발전시키고 재정을 통일할 문제를 연구한것이다. 모택동은 금융사업 화페발행은 반드시 통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사업은 이미 중공의 최고결책자들이 제일 먼저 말하는 단어로 부상됐다.  력사는 이미 공산당이 통일된 국가를 건립할 전야가 닥쳐왔다는 것을 알렸으며 중화 5천년 문명사상 일종 새로운 화페가 탄생됨을 예언했다. 

1948년은 공산당이나 국민당이나를 물론하고 모두 극히 순탄하지 않던 해였다. 전쟁에서의 빈번한 실패, 경제상에서 붕괴 그리고 인심이 떠난 국민당정권은 이미  숨이 턱에 다달았으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상임한지 오라지 않은 옹문호내각은 절망중에서 발악하고 있었다. 국민당정부 재정부장 왕운오는 이 시각도 부득불 골을 짜내며 화페개혁방안을 연구하여 효과를 보려고 날뛰였다. 갈길이 없게된 장개석은 이 개혁방안을 보고 실날 같은 목숨을 부지하려 했다. 이리하여 막간산 정의와 재정경제긴급 처분령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  

8월 23일 3일간 휴업했던 여러 대은행이 다시 문을 열고 새로운 화페로 낡은 화페를 바꾸게 했는데 비례는 300만 법페을 1원 금원권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법페의 침해를 받을대로 받은 민중들은 최초에는 이상하게도 열정적으로 호응하고 합작했다. 사람들은 은행문앞에 긴 줄을 서서 마대로 광주리로 법페를 가지고 와서 황갈색의 금원권을 바꿔 은행에 저축했다. 한달간 상해중앙은행은 백성의 손에서 황금, 백은, 외국화페를 도합 3억7천3백만원을 긁어 모았다.

1948년 9월 인민해방군이 8일간 밤낮 분전하여 견고하기로 소문난 제남성을 공략했으며 국민당제2전구사령 왕요무를 사로 잡았다. 제남전역의 승리는 장개석에게 중국인민해방군은 공약하지 못할 도시가 없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상해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10월 2일 민중들은 다투어 물건을 사기 시작했는데 더욱더 치렬해 지기 시작했다. 발행한지 두달밖에 안된 금원권이 미친듯이 하락하기 시작했으며 원래 국민당정부에서 요행으로 살아 남아 있던 중산계급은 하루밤 사이에 완전히 파산되게 됐으며 공상업자들도 기아에 허덕였고 생활의 밑바닥에 있던 빈곤한 백성들은 더욱 더 하늘 땅을 원망하게 되였다.

635712248_75dabcdc_E3E6F1E92623222693B26한순간 기아가 사람들에게 닥치였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국민당정부를 질타하며 하루 빨리 무너지기를 기원했다. 10월  3일 중공중앙은 인민페를 인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영국사람 임 매크가 오대산의 한 묘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에 있는 이 지페찍는 기계를 다루는 젊은이는  부발영이라 한다. 오늘날 그는 이미 90년 력사를 자랑하는 북영 지페인쇄공장의 령도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635712248_c28f1196_E3E6F1E92623222693B26당시진찰기변구인쇄국로동자 부발영:동필무가 남욕촌을 방문한적이 있습니다. 전국의 해방을 영접하기 위해 각지 근거지인 진찰기변구 기남 기로예변구에서는  통일된 지페를 사용했습니다. 먼저 하북은행 후에 중국인민은행이 성립되여 이 시기에 통일했지요. 통일된 지페를 인쇄할 때 중국인민은행이라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전문설계조를 성립했는데 중앙의 규정에 따라 설계한 후 남욕촌에서 일부 생산하고 전국이 해방된후 북경과 상해에서 분별하여 생산했습니다.

(남)해설원:국민당은 기대했던 화페개혁방안을 펼친지 70일도 못되여 부득불 거두어 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11월 1일 국민당정부는 물가를 제한하는 정책을 철수하고 화페개혁이 실패했음을 선고했다. 11월 3일 옹문호내각은 사직을 선포했고 두달반 이후 장개석은 하야를 선포했다.  1948년 12월 1일 중국인민은행은 하북성석가장에서 정식으로 성립됐다.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중앙은행은 자기의 직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같은날 첫패의 인민페가 발해행되여 류통됐으며 이는 중국금융력사상에의 대사로 됐다. 제1임 행장 남한신은 석가장화원판점에서 연회를 베풀어 경축했다.

같은날 <인민일보>는 사설을 발표해서 이 사건을 높이 평가했다. 50여년이 지난 오늘 이미 많은 사람들은 석가장시 중화대가 11호의 작은 회색층집을 알지 못하지만 이 집이 바로 중국인민은행이 성립될때의 옛터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참신한 인민페가 이곳에서 걸어나와 전국에 발행됐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새중국 금융력사를 더욱더 전면적으로 료해하기 위해 우리는 장주로 와서 홍색금융가 고첩성렬사의 손자 고경림을 찾았다. 그는 중국인민은행 장주시분행에서 사업했는데 같은 금융사업을 하는 자손이 있다는 것을 알면 고첩성렬사도 위안을 받을 것이다. 우리들은 고첩성렬사의 묘지에서 찍은 장면을 렬사의 유족인 고채보로인에게 보여 드렸다. 로인은 저도 모르게 격동돼 있었으며 비감에 젖어 있었다.

그는 자손들에게 서랍에서 편지 한통을 꺼내게 했다. 정하게 보관된 편지를 보는 순간 우리는 이는  진귀한 편지임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고첩성렬사가 1937년 연안에서 아저씨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였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백천돈가계에서 2만원의 빚을 졌습니다. 마음속으로 알고 있는데 리자까지 합치면 3만여원이 될것입니다. 국가를 구하고 민족을 구하기 위해 쓴 돈인만큼 본금과 리자를 모두 갚을 것입니다.”

 로인의 회억에서 우리는 당년 고첩성은 홍군을 지원할 때 돈가게의 2만여원 은돈을 썼던 것이다. 후에 비록 그는 섬북에서 돌아갔지만 그러나 이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 돈이 그의 부모에게 련루되였으며 더욱이는 18세 밖에 안되는 그의 안해가 련루되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고채보의 품속에는 방금 두달되는 아이가 있었는데 숨어다니며 국민당의 수색을 피해야 했고 또 조상이 물려준 가업을 팔아 빚도 갚아야 했다. 사람들을 가슴아프게 한 것은 고채보는 이 편지를 받은후 이때까지 남편과 만날날을 기다렸으며 그 기다림은 일생동안이였다.  

중국인민은행장주분행 오금영:고첩성렬사는 그의 아저씨 돈을 가져다 왕전춘에게 주어 혁명경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후날 그들이 와서 돈을 내라고 하자 그에게는 물어줄 돈이 없어 도처로 피해 다녔습니다. 본가집도 감히 가지 못했지요. 갚아 줄 돈이 없으므로 하루에 두끼밖에 먹지 못했는데 그 두때도 들나물이 아니면 콩찌꺼기였지요.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든 다음 나오는 찌꺼기와 들나물을 먹었습니다.   

(남)기자:방금 그의 말에 의하면 장신구도 팔았다지요?
(녀)오금영:맞아요. 장신구도 팔았지요
(남)기자 오건민:집에 값가는 물건은 모두 팔았습니다. 귀걸이 반지 등 팔만한 것은 다 팔았지요.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팔것은 다 팔았지요.

635712248_cebc7a79_E3E6F1E92623222693B26(녀)오금영:그는 저와 말하기를 늘 밤을 지새우며 수공일을 했답니다. 남의 옷을 깁거나 단추를 달아주고 신을 만들었으며 밤을 샜습니다. 당시 이 편지를 쓸때는 민국 26년이였지요. 그들은 국민당이 집을 수색할 때 이 편지를 발견하면 온집이 다 몰살될 것 같아 깊이 감추었습니다. 그는 편지를 지붕에 감추었는데 잘 보존돼 있었지요. 그는 당시 늘 여기저기 숨어다녔습니다. 이 편지를 보호한 것은 자손후대를 위함이지요. 때문에 아무리 고생스럽다 할지라도 그는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혁명의 후대이기에 지금까지도 그는 재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남)해설원: 장주를 떠난 후에도 우리의 심정은 오랫동안 평정을 찾지 못했다. 우리 제작팀은 또다시 앞으로 달려 산서 려성현 황애저진 소채촌에 이르렀다. 이곳은 기남은행소재지이다. 고첩성렬사가 전투하던 곳이다.

(남)원 기남은행소재지 집주인 연기창:당년 기남은행은 앞뒤 두개 뜨락이였습니다. 여기는 지페인쇄하는 곳이고 뒤울안은 저 층집밑에 또 공장이 있었습니다.
(남)기자:당년 기남은행은 여기에 9년간 있었습니다. 소채촌의 백성들은 은행을 보위하기 위해 중대한 희생을 치렀습니다. 특별히 곽성두일가는 9명이나 희생됐습니다. 그때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줄수 있지요?

(남)연기창: 그때 참안은 1944년 4월 4일 소탕 때 일어났습니다. 곽성두일가는 촌에 있었는데 첫날 밤에 공량을 전이시키고 또 은행을 방조해서 전이하다나니 온밤 고생했지요. 저기 산골짜기가 있는데 우초와라 부릅니다. 적들이 새벽에 불시에 포위했습니다. 곽성두일가를 마을에서 붙잡아다 심문했지요.  곽성두에세 은행 수장들이 어디로 달아났는가 물었습니다. 곽성두는 모른다. 은행의 기계를 어디에다 파묻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는 남이 숨긴 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고 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적들은 그의 자녀를 위협하며 날창으로 찌르고 총으로 쐈습니다. 곽성두는 분노하여 몽둥이를 던지며 “이것이 무슨 세상이냐 범보다 더 흉악하구나” 라고 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적들은 그의 일가 9명을 몽땅 죽이고 손녀 하나만 남겼습니다. 

당시 그는 9살이였습니다. 총창으로 찔렀는데 혼미상태에 있었지요. 적들은 죽은줄만 알고 갔습니다. 응급을 거쳐 이 아이는 살았는데 이름은 곽금녀입니다. 근거지에서 금융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 “인민군중은 진정한 보험궤이다” 곽두성과 소채촌 인민군중들은 붉은 피와 생명으로 이 한마디에 소박하고 진실한 주해를 달았다. 홍색금융의 보험궤는 마치 태항산의 돌처럼 묵중하고도 튼튼했다. 그는 중화민족의 대들보로 만들어졌다. 우리들이 소채촌을 떠날 때에야 끝내 공화국의 중앙은행은 무엇 때문에 인민의 은행인가를 알아차렸다.

중국인민은행이 성립된지 5개월 후 중국인민해방군은 장강을 도하해 계속하여 남경, 상해, 항주 등 대도시를 해방했다. 이러한 지방은 일찍 국민당관료자본의 통제중심이였다. 지금 홍색금융의 폭풍은 일체 더러운 진흙탕을 메워버렸다. 동필무가 쓴 중국인민은행이라는 6글자는 중국의 거리와 골목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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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 결승--새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제 5 집 인기글 천리 결승--새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제 5 집 (남)해설원: 1975년 7월 원 국민당 제12병퇀사령 황유가 특사를 받았다. 그는 공덕림전쟁범관리소 대문을 나서면서 생각지 못한 한가지 요구를 제기했는데 하북의 서백파로 가보련다는 것이였다. 그는 공산당은 지휘소를 서백파에 설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공산…(2013-02-04 09:55:11)


인민페의 탄생-새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제4집) 인기글 인민페의 탄생-새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제4집) (남)해설원: 하북성 섭현 서쪽에는 깎아지르는듯한 절벽에 웅위로운 공중루각이 한채 있는데 이를 왜황궁이라고 부른다. 왜황궁과 멀지 않는 곳에 일부 작은 건물들이 있는데 그것은 여러 개 비석들로 이루어 졌는데 이곳에 항일영웅 좌권장군이 모셔…(2013-01-31 09:09:34)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90년: 포동개발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90년: 포동개발 1990년 4월18일에 당중앙과 국무원에서는 상해시 포동지구개발을 다그칠데 관한 중앙의 결정을 정식으로 반포했습니다.포동은 황포강동쪽, 장강구 서남쪽, 천양하 북쪽으로…(2013-01-24 11:03:20)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9년: 희망공사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9년: 희망공사 “난 또 학교를 다니게 되였습니다.” 자그마한 여린 손이 흑판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이는 비단 배움의 기회를 잃은 아이들이 다시 학교로 오게된 기쁜 심정을 표달했을 뿐만아니…(2013-01-24 10:47:12)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7년: 력사적 사회발전단계를 정확히 확정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7년: 력사적 사회발전단계를 정확히 확정 1987년 10월25일부터 11월1일까지 중국공산당 제13차전국대표대회가 북경에서 개막되였는데 전국 4600만 당원을 대표하는 1936명의 대표가 대회에 출석했습니다. …(2013-01-24 08:58:11)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7년: “863” 계획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7년: “863” 계획 1986년3월3일 “세계고신기술발전을 따라갈데 관한 건의” 한부가 중공중앙에 올라갔습니다. 후에는 그 보고에 근거하여 중국고신기술연구와 발전에 심원한 영향을 끼…(2013-01-24 08:45:09)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5년: 백만대군축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5년: 백만대군축 1985년에 중앙군위에서 내린 백만대군축결책은 중국인민해방군이 당과 국가의 사업중점을 사회주의현대화건설에로 옮기는 전략적결책을 관철시달하기 위한 중대한 행동…(2013-01-24 08:21:32)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4년:경제리론의 새로운 돌파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4년:경제리론의 새로운 돌파 1984년 당중앙12기3중전원회의에서는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을 통과했습니다. 결정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전반 경제체제개혁중의 일련의 중대한 리론과 실천문제를…(2013-01-23 09:38:16)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3:통일대업의 위대한 구상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83:통일대업의 위대한 구상근대의 중국은 비바람속에 시달리고 굴욕을 받았으나 중국인민은 민족독립을 쟁취하고 국가의 주권과 령토완정 및 민족의 존엄을 수호하기 위하여 백여년을 끊임없이 분투하여 왔습…(2013-01-23 09:21:41)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2년: 중국농민의 위대한 창조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2년: 중국농민의 위대한 창조 1982년 1월 1일 중공중앙에서는 1호문건을 발급했습니다. 우리 나라 농촌에서 나타나고 있는 농호별생산량도급제 등 여러가지 형식의 생산책임제를 긍정한것입니다. 사회주의 집체경제의 …(2013-01-23 09:01:44)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2년: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강령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 공화국의 발자취 1982년: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강령 1982년 9월 1일부터 11일까지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가 북경에서 성대하게 개막되였습니다. 등소평이 대회개막식을 사회하고 동시에 개막사를 드렸습니다 그는…(2013-01-23 08:54:18)
렌즈속의 기억-공화국발자취 1981년: 지도사상에서의 혼란상태수습의 승리적인 완수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발자취1981년: 지도사상에서의 혼란상태수습의 승리적인 완수11기3차 전원회의후 우리 당은 장기적으로 내려온 좌적사상을 청리, 규정하고 사상, 정치, 조직, 경제 등 령역에서 혼란한 상태를 바로잡기 시작했습니다. 문화대혁명 및 건국이…(2013-01-21 08:10:53)
렌즈속의 기억-공화국발자취 1980년: 정치제제개혁의 발걸음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발자취 1980년: 정치제제개혁의 발걸음 1980년 8월 18일 등소평동지가 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한 “당과 국가의 령도제도의 개혁”이라는 중요연설은 새시기 당과 국가의 령도제도개혁에 방향을 기리켜주었습니…(2013-01-21 07:41:55)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77년:대학입시 문을 다시 열다.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77년:대학입시 문을 다시 열다 매년 여름철이면 중국에서는 모두 전국적인 대학입시를 맞이합니다. 이는 중국에서 목전 규모가 제일 크고 백성들의 인정도가 가장 높은 최고인재선발 제도로서 무수한 청년…(2013-01-18 08:20:53)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76년:10월의 승리 인기글 렌즈속의 기억-공화국의 발자취 1976년:10월의 승리 1976은 중국사회가 격렬한 요동을 치던 한해였습다. 이 한해동안 중국에서는 세계를 놀리우는 일련의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1월 8일, 주은래총리가 서거했습니다…(2013-01-18 08: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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