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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 결승--새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제 5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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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변도서관| 작성일 :13-02-04 09:55| 조회 :4,70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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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리 결승--새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제 5 집



(남)해설원: 1975년 7월 원 국민당 제12병퇀사령 황유가 특사를 받았다. 그는 공덕림전쟁범관리소 대문을 나서면서 생각지 못한 한가지 요구를 제기했는데 하북의 서백파로 가보련다는 것이였다. 그는 공산당은 지휘소를 서백파에 설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공산당이 어떤 힘으로 근근히 4달도 안되는 기간에 장개석의 100만되는 군대를 무너뜨렸는가는 알지 못하고 있다.

1948년 12월 회해전역 전장에서 포로되여서부터 이 문제는 황포군관을 졸업한 그를 옹근 27년이나 곤혹하게 만들었다. 오두막 같은 작은 집에 들어서 황유는 희미한 광선을 빌어 자세하게 초라한 집안을 돌아보다가 꼼짝 않고 오랫동안 서있었다. 문을 나서 하늘을 쳐다보며 긴한숨을 토한 뒤 “공산당은 위대하다. 국민당은 응당 패해야 한다”고 탄식했다.

635712248_c1df1056_3.jpg보통 주민이 살고 있는 낮고도 비좁은 이 주택이 바로 중앙군위의 작전실이다.  두칸짜리 집에 전체경위원과 참모인원이 주숙하고 있었는데 사업인원은 30명도 채 안된다. 가능하게 이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지휘부일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차례 전쟁을 지휘했다. 이곳에 지금까지 놓여 있는 나무책상과 걸상이 바로 일국에 두개과의 전부의 사무가구이며 이곳에서 전장과의 유일한 련계는 전보였다. 주은래는 일찍 유모아적으로 “우리의 이 사령부는 첫째 총을 발급하지 않고 둘째로 사람을 발급하지 않으며 그저 날마다 전보를 발송한다”라고 했다. 모택동과 중앙군위는 197통의 전보로 중외를 놀래우는 3대전역을 치루었다. 작전참모 류장명은 당년 빈번히 이 집을 나들던 사람으로서 그의 구체적인 사업은 곧 모택동과 기타 수장들에게 전보를 나르는 것이다.

1948년 해방전쟁이 이미 2년 진행된 뒤, 전국의 군사정치형세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국민당의 동북전장에서의 55만 군대는 각기 장춘, 심양 금주 3개 고립지점에 압축되여 있었다. 1948년 가을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결전은 먼저 검은토지 우에서 전개됐다. 전반전역을 포치하는 과정에서 중공통수부와 동북전구지휘부는 작전방침에서 일찍 여러 차례의 분기가 발생했는데 인식을 통일하고 부서를 협조하기 위해 모택동과 중앙군위는 편벽한 서백파에서 천산만수 떨어져 있는 림표의 동북야전군 지휘소와 금주전역이 시작된 며칠사이 20여통의 전보를 주고 받았다.   어떤 전보문은 몇천자에 달했으며 한두시간 사이로 주고 받았다. 

 전보는 전쟁중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통신수단으로서 공산당에 의해 기교가 절정에 이르러 사람을 활홀하게 할 지경으로 운용되였다. 높은 효률은 우리군으로 하여금 순식간에 변하는 전장에서 한차례 또 한차례의 기회를 잡게 했으며 시간을 얻고 승리를 얻게 했다. 대전이 시작되기전 모택동은 전국전쟁국세로부터 출발하여 금주를 탈취할 것을 제출하고  동북대문을 닫고 장개석군대를 동북에 몰아 넣고 각개 섬멸하는 전략구상을 세웠다.

그러나 전선최고지휘원인 림표는 거의 입에 들어온 새끼양을 놓치기 아쉬워 주력부대를 먼저  포위된지 오랜 장춘을 공격하려 했다.  쟁론을 거쳐 림표는 최종 군위의 의견을 접수하기로 했다. 9월7일 모택동은 “장춘과 심양의 적을 상관하지 말고 금주를 치되 장춘과 심양에서 금주를 지원하러 오는 적을 섬멸하라”고 했다. 이로서 료심전역의 대정방침은 이미 확정됐다.

635712248_7763410a_4B8B2C7A5.jpg잇달아 동북야전군은 금주로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림표는 국민당 신5군과 94군 4개사가 호로도에 등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7일간의 량식을 준비한 림표는 적들에게 복부를 맞을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림표는 “밥상 하나를 차렸는데 두개상의 손님이 왔다”고 비유했다.  10월 2일 22시 림표는 군위에 전보를 쳐 다시 장춘으로 돌아갈 것을 제출했다. 일생 원칙문제에서 양보를 하지 않는 모택동은 이튿날 17시와 19시에 련속 전보를 보내 견정히 “기정방침을 당신들은 절대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5시간 후 모택동은 림표가 “비판을 접수한다. 먼저 금주를 치기로 결심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모택동은 이튿날 새벽 전보에서 첫마디로 “매우 좋다. 매우 안위된다”고 했다. 이리하여 이 한차례의 전쟁결과 나아가서는 력사의 갈림길에 관계되는 쟁론은 10월 2일 22시부터 4일 6시까지 근근히 32시간내 몇통의 전보로 해결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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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와 원수는 비록 수천리 떨어져 있었지만 재빨리 일치를 가져왔다. 모택동과 림표가 의견분기가 있던 날 장개석은 미령호전용비행기로 총망히 심양에 도착했다. 서로 다르다면 그와 위립황은 작전방침상에서의 의견차이는 갈수록 멀어지고 다툼도 격렬해 졌다. 전용비행기로 분주히 남경과 심양을 나들며 장군과 원수가 말싸움만 벌리며 서로 양보하지 않았기에 전역이 시작되여 결국에는 아무런 결책도 내놓지 못했다.   

모택동은 장개석에 대하여 손금보듯이 알고 있었다. 그는 “장개석이 심양에 날아갔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승리는 더 파악이 있게 된다”하고 하셨다. 주은래도 “장개석이 어디에 가면 그 지방의 싸움은 쉽게 끝난다. 그는 종래로 마구 지휘한다”라고 했다.

금주는 동북과 화북을 련결하는 전략 요충지로서 기열료 3성의 교통인후이며 국민당군대가 관내로 퇴각하는 대문이다. 아울러 위만성부 층집과 성북의 일본인이 수건한 배수지는 곧 대문의 두개 열쇠로서 문을 닫고 개를 때리는 관건은 금주를 탈취하는것이다. 또 이 두개 열쇠를 여는 것이 금주를 탈취하는 관건이였다. 

635712248_8e4fbce0_B4EBC6F7.jpg진렬관에 전시된 이 한문의 포는 금주를 공략하는 전역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 포가 바로 금주를 수비하는 적들이 가지고 있는 첫번째 열쇠인 배수지를 무너뜨렸다. 이로보아 이때의 동북해방군은 무기상에서 이미 매우 큰 개선을 가져왔는바 군사력이 강하고 퇀에 포병련이 있고 사에 포병영이 있으며 종대에 포병퇀이 있고 총부에 또 한 개 포병종대가 있었다. 금주를 공략할 때 아군의 포화배치는 적군의 3배에 달했으며 현대화한 장비에 무적의 정신은 배수지를 때리는 전투에서 충분하게 발휘됐다. 

당시 동북야전군3종7사포병영 교도원 담순전:지금 부르는 이 배수지는 아직도 사용합니다. 물을 빼면 한 개 강화대대가 들어 갈수 있습니다. 두 각 사이에 암보루가 있는데 매 암보루에 한정의 기관총을 배치했습니다. 부대가 저 교통호에서 널을 놓거나 사다리를 놓고 건너올 경우 이 두개 기관총은 면바로 교차됩니다. 당시 림표는 강명령을 내렸습니다. 7사 당시에는 20퇀이라 불렀는데 래일 날이 밝기전 반드시 배수지를 점령해야 하지 그렇지 못할 경우 총살하겠다고 했습니다.  

(남)해설원:군령이 태산과 같아 전사들은 하루밤 사이에 한갈래 넓은 교통호를 파냈으며 대포는 전연과 백메터 떨어진 곳까지 운송돼 왔다. 배수지가 무너졌다. 금주를 고수하던 첫번째 열쇠가 열렸다. 날창으로 육박전을 하던 정신으로 무장된 포병군대를 그 누구도 전승하지 못했다. 

 외각포위공사를 청리한 후 10월 14일 11시, 림표는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한차례 가장 치렬한 진공전이 시작됐다. 구문청이 있던 819퇀 3영 8련은 위만성부 층집을 공격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동북야전군 2종 7사 819퇀3영 8련지도원 구문청: 11시 반에 공격을 시작해서 밤이 되도록 싸웠지요. 어떤 련은 7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영장은 이때 3번째로 저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635712248_bd500565_B1DDC1D6C0FCC5F5.jpg(남)해설원:전사들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나가면서 작약꾸러미를 죽기내로 날랐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들 앞에서 금주의 두번째 열쇠는 열리고 말았다. 31시간의 피어린 싸움을 거쳐 골 깊고 성이 견고하던 금주는 해방됐다. 황포1기생 범한걸은 4기생 림표의 포로로 되였다. 이후의 전쟁발전은 모택동의 전략사상이 정확했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했으며 림표로 하여금 고려를 없애게 했다. 금주가 해방됨에 따라 장춘은 고립무원하게 됐고 심양도 얼마지나지 않아 공략되였으며 동북전체가 인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52일간 진행됐던 료심전역은 원만한 마침표를 찍었다.

흑토지에서 격렬한 전쟁이 치러지고 있을 무렵인 9월 24일, 제남이 해방되였다. 이튿날 속유장군은 싸움을 요청하는 한통의 전보를 서백파에 날렸는데 회해전역을 거행할 구상을 제출했던것이다. 모택동은 산동에서 날아온 전보문을 받고 흥분에 휩싸였다. 그는 여러날째 나가지 않던 작은 방을 뛰쳐나와 석마앞에 이르러 주은래와 함께 더욱 큰 규모의 전역을 구상했다. 제남을 공략하고 회해에서 결전하게 되면 해방전쟁의 진행을 크게 빨릴수 있었다. 

 그들은 이때 인민해방군은 이미 공략하지 못할 도시가 없으며 치르지 못할 싸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택동의 눈길은 동북전장을 지켜보는 동시에 또 중원대지에서 전투기회를 찾고 있었다. 연구와 토론을 거쳐 모택동은 화북야전군에 전보를 발송했다. “우리들이 회해전역을 거행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느낀다. 목전 대휴정이 필요없다. 회해전역을 치르고 난 뒤 한차례 대휴정을 해야 한다”

635712248_8863a104_C1F8C0C7.jpg이때 멀리 하남 보풍에 있던 류백승, 진의도 속유의 전보문소식을 들었다. 류백승은 흥분되여 말했다. “제남공략은 적들에게 매우 큰 진동을 주었다. 승리의 사신을 그 누구도 막지 못할것이다. 우리 군은 승리적으로 남하해야 할 시기가 왔다” 장수들은 말없는 가운데서 뜻이 서로 맞았으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들은 강회평원에서 전장을 벌려 국민당의 유생력량을 장강이북에서 소멸하기로 약속했다.

몇 달후 모택동은 중남해에서 속유에게 “동무가 제남을 때리라 두 사람이 생각못했는데 하나는 장개석이다”라고 말하자 속유는 다급히 “다른 한 사람은요?”라고 물었다. 모택동은 “그 사람이 바로 나요”라고 말하자 두사람은 큰소리로 웃었다. 장개석도 이때 서주로 와 있었다.   

 동북이 희망이 없게 되자 장개석은 또 남경 무한 서주에서 분주히 병력을 동원해 똑 같이 여기에서 한차례 큰 싸움을 벌리려 결심했다.

장개석은 이곳을 적수를 장강이북에서 막고 수도를 보위하고 남경을 보위하려는 곳으로 확정했다. 두개 사령부는 동시에 서주을 바라 보았는데 하나는 공격이고 하나는 지키기 위해서였다. 같은 전장에서 두가지 심정이다. 서주 이 력사적 고성은 장강의 열쇠로 되며 중원요지로서 력래로 병가들이 쟁탈하는 땅이다. 이번 장개석은 또 그의 사령부을 이곳에 세웠다.

1948년 11월 6일, 회해전역의 서막이 열렸다. 적아쌍방 1백40만 대군이 회해평원에서 서로 엉켜 있었다. 전역이 시작되기전 모택동은 전보로 지시를 내렸다. “먼저 신안진의 황백도를 때림으로서 황백도가 서주로 퇴각하지 못하게 추격하여 그를 서주외각에서 소멸해야 한다”  바로 이 첫주먹은 장개석의 요해를 찔렀다. 당시 참전부대에서 가장 크게 울렸던 구호는 “우리들의 두 다리로 뛰여 적들의 자동차바퀴를 제쳐야 한다”는 것이다. 원 회해전역기념관 관장 우세경은 우리를 위해 당년의 회해전가를 불렀다.

(남)관장 우세경:황백도병퇀은 신안진지구에서 서주로 향해 도망치니 우리들은 쫓아가야 한다. 추격해 적들로 하여금 도망치게 못하게 만들자. 추격해 적들로 하여금 도망치게 못하게 만들자. 보라. 적들이 무너진다. 적들이 달아난다. 동지들 빨리 쫓아가자. 빨리 쫓아가자. 빨리 쫓아가자.

(남)해설원:한 종군작가는 큰 편폭으로 대군이 강을 건너던 이야기를 서술했는데 당년의 정경을 생동하게 재현했다.
(남)작가 강심:이 이야기는 감각이 매우 풍부합니다. 당시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강을 건너며 뒤로 돌앗 신을 벗습니다. 뒤로 돌앗 각반을 풉니다. 뒤로 돌앗. 바지를 벗습니다. 당시 전반부대가 맨 엉덩이였지요. 바로 이런 일이 있었는데 정말입니다.

(남)해설원:전사들은 바로 이러한 용기, 이러한 정신으로 회해에 몸을 던졌다. 통수의 신심은 장군으로부터 오며 장군의 신심은 사병들로부터 온다. 좁은 길에서 적수와 마주칠 때 통수로부터 사병에 이르기까지 신심이 충만된 일방이 반드시 승리한다.

11월 8일 황백도병퇀은 년장에 포위되였다. 황백도는 남경에 구원을 애걸했으나 장개석은 그에게 공중으로 소좌 한명과 무전기 한대를 뿌려 주었다.  소좌는 황백도에게 온실에서 자란 오이 두뿌리를 가져 왔는데 꽃이 곱게 피여 있고 싱싱하여 먹어버리기 아까와 매일 손에 쥐고 다녔다. 남경에서 보내온 이 오이를 들고 있으면 그의 마음은 좀 놓이는듯 했다. 그러나 이 오이는 그의 부대의 사기마냥 재빨리 시들어 갔다.

장개석은 또 비행기로 말만 있고 아무런 물건도 없는 편지 한통을 투하했는데 다음과 같이 썼다. “이번 서회회전은 혁명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며 집 존망의 최대지 관건으로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황백도는 실망적으로 웃으며 오이를 땅바닥에 힘껏 던지더니 “목숨을 내걸 준비를 하자”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어떻게 목숨을 내걸어야 할지 그는 모르고 있었다. 장개석의 엄령하에 그를 위해 포위를 풀려고 달려온 몇 개갈래의 대군은 그림자도 없었으며 용병자중한 리미와 의심이 많은 구청천은 먼곳에서 구경만 할뿐이고 고군으로 빠져 들어 온 황유는 이미 아군에 의하여 쌍추집에 묶여 있었다. 

 년장, 모택동의 바둑판에서 이미 죽어버린 쪽이다. 국민당이 서로 물고 뜯고 하는것과는 달리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우리 중원과 화동 두갈래 야전군은 회해에서 회사한후 서로 어깨겯고 싸우고 입술처럼 친근했다. 회갑을 넘은 이 두분의 로병사는 당시 두 부동한 야전군에 속해 있었는데 그들은 전투중에서 생사우의을 맺었으며 그 정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당시 화동야전군 3종8사24퇀1영1련 지도원 공문명:우리는 좋은 총과 포를 얻어 전부 2야전군에 주자!  6종대에 보내자는 구호를 제출했습니다.
당시 화동야전군6종16려46퇀1영 교도원 좌삼성:우리 1영의 3련 3패 기관총반은 아직 두사람이 남았습니다. 탄알도 다 쏘아 없습니다. 당신들 3련도 3패 기관총반인데 아직 한사람이 남았고 또 카나다기관총 한자루가 남았습니다. 왕풍명의 조직하에 두개 야전군의 3련 3패 기관총반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남)해설원: 11월 19일 10시,  두 대야전군은 황백도 최후의 8개퇀이 고수하고 있던 년장 등 부락을 향해 총공격을 발동했다. 이틀간의 격전끝에 적군을 전멸시켰다.  21일 오전, 황백도의 지휘부는 점령되였으며 최후시각 황백도는 지붕우에 올라 남경을 바라보았다.

635712248_86b91617_E3E6F1E92623222693B26이 한채의 낡은 집은 그때의 정경을 견증하며 지나간 그때의 이야기를 견증했다. 남경이 이미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지 못하게 되자 그는 려명전의 안개의 엄호하에 지휘소를 탈출했다. 그는 능히 포위를 돌파할수 있었으나 죽음의 그림자속을 헤여나갈수 없어 마을밖 이 갈대밭속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당지 백성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이 밭에는 갈대만 자랄 뿐 농사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그 전날인 11월 20일 모택동은 전보로 전선위원회에 황백도를 소멸한 후 먼저 황유를 때리라고 지시했다. 황유의 12병퇀은 줄곧 장개석의 직계부대로서 장개석은 가장 좋은 미국식장비를 황유한테  주었다. 그러나 황유는 도리여 이 장비를 빼돌려 사용하며 수백대의 자동차 땅크를 쌍추집주위에 배치하고 알심들여 자동차 방선을 구축했다. 당년의 집주인은 우리에게 그가 본 한무지 강철괴물을 묘사했다. 

(남)기자:이전 싸움할 때 황유가 여기에 있었다는데 당신도 여기에 있었습니까:
(남)집주인:며칠있다가 달아았습니다.저는 달아났지요.
(남)해설원:소위 자동차방선이란 실제상 자동차를 전호우에 덮어 놓음으로서 밑은 하나의 굴로 되였다.
(남)기자:지금 서있는 곳이 당신이 말한 굴입니까?
(남)집주인:바로 이 굴입니다.
(남)해설원:황유는 이 갱도를 드나들었는데 동굴문이 바로 여기이다.
(남)집주인:자동차를 이렇게 하나 하나 여기를 에워쌓는데 자동차 밑은 비여 있었지요. 그들은 이 자동차 밑에 있었습니다.

635712248_05cfbb04_C0DAB5BFC2F7.jpg(남)해설원: 12월 5일 11시05분, 황유병퇀에 대한 총공격이 개시됐다. 전투가 결속된 후 종군기자가 사진기와 촬영기로 전장의 참상을 기록했다. 황유가 딸라와 강철로 구축한 방선이 이 모양이였다. 이 기계화왕패군이 이렇게 자동차로 작전했으니 장개석과 미국사람들은 아마 상상도 못했을것이다. 황유는 원래 기적을 창조하려 했으나 결국 웃음거리만 만들고 말았다. 당년 참혹했던 전장은 이미 평정되였다. 그러나 마을 밖으로 흐르는 작은 강은 도리여 늘 사람들에게 자동차진지로 아군의 공세를 막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635712248_00dd03dc_C8B2C0AF.jpg지키지 못하니 도망쳐야 했기에 황유는 자동차보다 더 든든한 땅크를 몰고 포위를 뚫으려 했다. 그러나 땅크가 이 작은 강에 들어서자 발동이 꺼져버리고 말았다. 이는 그야말로 풍자의미가 있는 결과이다. 일생 기계화 혜택을 받아왔던 황유장군은 최후 기계화와 같이 전장에 남게 되였으며 우리군의 포로로 되였다.  포로된 황유는 달갑지 않았으며 공덕림전쟁관리소에서 27년간 개조를 받으며 시종 자기가 어떻게 패하였는지를 몰랐으나 서백파로 와서 자기 눈으로 그곳의 일체를 본 후에야 비로서 철저히 마음속으로 탄복하고 말았다.


황유병퇀이 소멸된 후 총전위 5명의 수장들은 채요촌에서 한차례 회의를 열었으며 매우 유명한 사진 한장을 남겼다. 집주인의 아들은 이 사진을 대물림보배로 간직하고 가장 눈에 띄이는 곳에 정중이 모셔놓았다. 다섯분의 수장들은 대전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만났으며 류백승과 속유는 갈라진지 16년만에 재차 상봉했다.

635712248_390069e7_B4D9BCB8BCF6C0E5.jpg이때 이미 전역은 절반이상 진행되였다. 이틀 후 그들은 또 각자의 전장터를 향했다. 그전 그후 그들지간의 련계는 마찬가지로 전보의 왕래로 이어졌다. 이때 회해전역의 싸움터에서 오직 두률명집단만이 남아 첩첩한 포위속에 있었다. 멀리 북평의 부작의를 붙잡아 두어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군위에서는 총전위에 령을 내려 두주일간 두률명집단에 총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1949년 양력설은 두 군의 대립 사이로 찾아왔다. 우리군 전사들은 좁은 전호속에서 그들의 방식대로 신년을 보내며 이제 당금 다가올 승리를 경축했다. 아군진지와는 달리 이곳은 너무나 비참한 정경이였다. 기아에 시달린 사병들은 량식과 야초를 깡그리 먹어버렸으며 전마와 말안장 그리고 나무껍질과 솜도 모두 먹어버렸다. 만약 국민당군대가 료심에서 실패한 것이 원수가 모략이 없어 복멸되였다면 이곳의 병사들은 이미 투지를 상실해 버렸다. 
635712248_01de6599_B8D4C0BBB0CD+BEF8BEEE모택동의 이 문장에서 보다싶이 두률명더러 저항을 버리라고 설득하지 못했지만 그로 하여금 황유처럼 전쟁범관리소로 걸어 들어가게 했다. 그의 1만 4천명 관병들은 진지의 이쪽 전호속에서 아군의 전호로 넘어오게 되였다. 몇때의 밥을 배부르게 먹은후 일부 사람들은 비로서 사고하기 시작했는데 배부르게 먹으려면 반드시 공산당을 따라가야 했기에 그들은 해방군에게 겨누었던 총뿌리를 돌려 해방군전사로 변해버렸다. 

십몇년이 지난후 영국의 몽그마리원수를 환영하는 연회에서 두률명과 진의원수가 서로 만났다. 몽그마리가 두률명에게 물었다. “당신의 군대는 어디로 달아 났습니까?” 두률명은 진의를 가리키며 “모두 이분한테로 갔습니다”라고 했다. 그야말로 사색을 일으키는 말이다.  

예소완 3성의 접경지역에 있는 이 마을을 진관장이라 부른다. 두률명의 사령부는 여기에 설치됐다.  여기로 오기전 우리는 두률명이 미신을 믿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집주인의 아들인 진요정은 우리에게 이는 전설이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남)집주인의 아들 진요정:15일 이후 두률명이 이 뜨락에서 리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한 참모가 그에게 “우리가 여기에 주숙하는 것이 불길합니다” 라고 하자 그는 “왜 불길한가”고 했습니다. 그 참모는 “네모칸에 나무가 있으니 우리를 붙잡아 둡니다”라고 했지요. 두률명은 “면바로 땔나무가 없는데 이 나무를 베여버려라”라고 하는것이였습니다

635712248_b30c7d63_B5CEB7FCB8ED.jpg(남)해설원:우아했던 두률명장군이 이러한 기괴한 이야기를 믿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그의 심리가 붕괴됐다는 것을 설명한다. 나무는 찎어버렸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포위는 해탈하지 못하고 말았다. 1949년 1월 10일 총공격이 시작된 이틀후 두률명은 장로장의 성이 단씨라는 농민에게 사로 잡히고 말았다.  

 회해전역기념관에 들어서면 “오늘 전쟁범죄자 두률명 한명을 접수”라는 인수증 한장을 볼수 있다. 이 인수증과 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작은 문물 하나가 있는데 작은 참대막대기였다. 멀리서 바라보면 눈에 잘 띄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것은 국가1급문물이다.  참대막대기의 주인은 한 전선지원모범으로서 그의 이름은 당화은이다. 당년 그는 이 막대기를 지팡이로 삼고 고향인 래양에서 출발하여 매 지방에 갈때마다 지명을 새겨넣었다.  회해전역이 결속될 때 중국지명으로 빽빽이 장식된 이 막대기는 전선지원대군의 발자국을 기록한 견증이다. 우리는 이 참대막대기의 주인을 찾기로 결정했다.

635712248_dc820684_C2FCB4EB.jpg기념관 관장은 우리를 위해 이 막대기와 비슷한 참대막대기를 주면서 이 막대기는 래양에서 한장의 특수한 소개신이라고 말했다.  당화은의 고향은 래양시 서두산촌이다. 

(남)기자:할아버지 길을 물읍시다. 서두산을 어떻게 갑니까?
(남)촌민:당화은을 찾는구만요.
(녀)촌민:“차바퀴가 굴러간다”에서의 그가 아닌가요?
(남)해설원:    당화은은 몇 년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지금도 여전히 서두산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남)기자:8월 10일, 이 재료에 근거하면 그는 이듬해 정월 초 여드레날 돌아왔지 않습니까?
(남)당화은의 아들:이 우에서 말한 것은 당시에 쓴것입니다.
(남)기자:모두 31개성 시 현성입니다
(남)당화은의 아들:75개 마을인데 왕복 8000여리입니다.

(남)해설원: 당화은은 그의 마을에서 과연 명인이였다. 이 막대기를 바라보노라니 우리는 저도 모르게 진의원수의 “회해전역의 승리는 백성들이이 밀차로 밀고 온것이다” 라는 명언이 떠오른다

회해전역이후 장개석의 장강이북에서의 작전주력은 오직 부작의의 몇십만 인마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북평과 남경지간을 오가면서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 먼저 장개석은 부작의에게 엄령을 내려 평진을 고수하라 했다가  후에는 남쪽으로 철거하라고 했다. 장개석이 좌우로 흔들리니 부작의도 어쩔줄 몰라했다. 그는 장가구로부터 당고 사이 300킬로메터지역에 장사진을 쳐놓았는데 그 용의는 매우 뚜렷한바 자기에게 두갈래 퇴로를 남겨 놓음으로써 혹은 서쪽으로 고향인 수원으로 가거나 혹은 동쪽으로 해상로를 따라 남하하려는것이였다.   

자신만만한 모택동은 서백파에서 이 장사진을 바라보다가 부작의를 남겨놓으려 결심했다. 천천히 때리고 천천히 말하며 말하다 때리고 때리다 말하려 했다. 이 시기 한통 한통의 전선으로 발송하는 전보문에서 늘 “갈라 놓되 포위하지 말고 포위하되 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볼수 있었다.

료심전역이 결속된 후 동북야전군은 중앙군위의 지시에 따라 비밀리에 입관하여 부작의의 장사진은 끊어지고 분할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1948년 11월 29일 화북야전군 제3병퇀이 장가구를 향해 진공을 발동해서 평진전역이 정식으로 시작됐다. 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해 부작의는 급령을 내려 그의 직계부대인 35군을 북평으로부터 서쪽을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오만한 35군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되돌아 동쪽으로 철퇴하던 도중 신보안에서 아군에게 포위됐다.  장가구를 잃자 부작의는 서쪽으로 출격하려는 생각을 접고 말았다. 곽경운이 죽자 그의 최후 한장의 왕패가 사라져 벼렸다. 1948년 12월 5일부터 시작해서 동북야전군은 대거로 입관했다. 북평, 천진은 분할포위되여 두개의 고립무원한 도시로 변했다. 이로부터 진지에서는 늘 일부 담판대표단이 들락거리는 것을 볼수 있었다. 쌍방대표의 초기담판은 이곳에서 시작됐다.

이때 부작의는 아직도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천진을 시간을 쟁취하는 행표로 간주하고 진장첩에게 한동안 버티면 방법이 있을거라고 말해 주었다. 이 일념의 차이로 천진과 북평은 일전일화로 해방되게 되였는데 이는 부작의의 일생후회를 남겼다.  천진은 북평의 문호로서 국민당이 구축한 길이 84리에 달하는800억법페를 투자한 한갈래 방선이 있었다. 부작의의 담판대표는 일찍 자신있게 우리들이 적어도 30일간 지킬수 있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30시간도 지켜내지 못했다. 

1월 14일 10시, 천진을 진공하는 전역이 울렸다. 전사들은 너비 10메터, 깊이 3메터에 달하는 전호를 넘고 높이 4메터에 달하는 성벽을 넘어 날이 어두워지기전 시내로 쳐들어갔다. 하루밤의 격렬한 항전을 거쳐 15일 오후 3시 금강교두에서 아군은 회사했다. 국민당천진수비사령관 진장첩도 포로됐다.  그후 그는 공덕림에서 10년간 개조를 접수했다. 석방후 그는 부작의를 만났는데 당년 그에게 내린 명령을 의연히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닷새후인  1949년 1월 19일, 평화적으로 북평문제를 해결하는 협의 서명의식이 이곳에서 진행됐다. 인민해방군은 끝내 북평성문을 여는 열쇠를 가지게 되였다.  2월 3일 대군은 도시로 들어갔다. 유서깊은 북평은 들끓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해방을 경축하고 해방군을 영접했다.

635712248_376205d2_C0FBBBEF.jpg당년 어떤 사람이 이 사진을 찍었는데 이는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으로 보는 문화적삼일것이다. 료심, 회해, 평진 3대전역은 우리군의 전면적인 승리로 끝났다. 모택동은 이 4개월동안의 휘황을 회고했다. “료심전역때 우리는 문을 닫고 때렸고 회해전역때  우리는 쫓아가서 때렸으며 평진전역에 이르러서 우리는 부작의를 남겨놓고 때렸다.”  이는 얼마나 여유있고 얼마나 대범하고 자연스러운가.

서백파기념관에는 이런 한폭의 전람이 있다. 이 전람아래 두장의 사진이 놓여 있는데 그들 한분은 장군이고 다른 한분은 사병이다. 장군의 이름은 주서인데 3대전역에서 희생된 우리군의 직무가 가장 높은 지휘원이며 사병의 이름은 량세영인데 그는 자기의 24세밖에 안되는 가슴으로 적의 기관총을 막았다.

해방전쟁중 이 사병과 같이 장렬하게 희생된 또 한분의 하북적전사가 있는데 그의 이름은 동존서이다. 그가 작약꾸러미를 받쳐들고 최후로 웨친 것은 우리 매개 인민해방군전사의 마음속의 소리였다. 새중국을 위하여 전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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